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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라비] 빈 잔












알렌은 자정을 조금 넘어서 펍에 도착했다. 라비가 핸드폰의 배터리를 분리한 지 정확히 한 시간 만이었다. 숨을 가쁘게 내쉬며 다가온 알렌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으로 잠깐 라비를 내려다보았지만 이윽고 묵묵히 맞은편에 의자를 빼 앉았다. 그는 일절 술을 하지 않는 사람이므로 이런 자리가 낯선 것 같았다. 바싹 긴장하고 자꾸 손을 떨었다. 왼손을 떨면 오른손이 잡지만 그게 쉬이 진정될 리 없었다. 술기운에 반쯤 감긴 눈을 느리게 꿈뻑이면서 라비는 알렌에 대해 생각했다. 상냥함과 온유함, 배려, 희생 그리고 불안과 음울. 그에게선 극단적인 개성들이 위태롭게 교호했으며 그런 방식으로 스스로를 좀먹고 있었다. 



밥은……. 먹었어. 라비가 짧게 대꾸했다. 지금 먹지 않았다고 한들 같이 식사나 할 처지는 아니었으니까. 그냥 알렌의 습관적인 친절함 중 하나였다. 펍에선 언제나 시끄러운 클럽음악만을 틀어놓았는데 오늘따라 왜인지 조금 울적했다. 라비는 끊임없이 생각을 버려나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지를 뻗어나가는 메마른 사색 속에서 끝이 없는 허방이 느껴졌다. 한참동안의 침묵. 결국 알렌이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아. 라비는 그의 가여움에 약했다. 그는 슬슬 울먹였다. 




“…미안해요, 라비.”




끝까지 좋은 사람. 그게 알렌 워커였다. 



가끔은 탓해주면 좋을 텐데 생각했다. 하기야 남을 비난하는 알렌이라니, 전혀 현실감 없는 이야기다. 알렌은 단단한 껍질 속으로 깊이 썩어 있는 지리멸렬한 감정만큼이나 강박적이었다. 그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걸 친절이라고 불렀지만 라비가 보기에는 집착이었다. 라비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비슷한 시련을 겪었던 적이 있었으므로 그러했다. 다시 말해서, 알렌에게는 라비만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있었으며 그게 바로 그를 착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라비가 처음 이별을 통보했을 때 알렌은 울지 않았다. 한탕 말다툼한 다음날처럼 묵묵히 아침밥을 차리고 옷을 다려주었다. 두 번째엔 안아주었으며, 세 번째엔 부드럽게 설득했고, 가장 최근엔 살려달라고 말했다. 대체 무엇이 그를 죽이고 있는지는 몰랐으나 적어도 그때 라비는 자신이 알렌을 살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울음 앞에 라비는 무력했고 그 와중에도 그는 자꾸 무너졌기 때문이다.



문득 옛 동화말이 떠올랐다. 장님과 절음발이가 함께 힘을 합쳐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이야기. 본래 의도하려던 건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 완벽해지자는 교훈이었겠지만, 실상은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봤자 그만큼의 빈 자리가 생길 뿐 결코 온전해질 수 없단 거다. 둘이 합쳐 고작해야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졸렬함으로 자기위안하기에는 그들은 이미 너무 비참해져 있었다. 



음악이 수차례 바뀌고 의식은 차츰 또렷해졌다. 술기운이 간절해졌다. 제정신으로는 차마 그 얼굴을 마주보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알렌이 기어코 뚝뚝 눈물을 흘렸다. 아. 라비는 그의 가여움에 약했다. 과거의 편린에 거울을 비추듯 닮았으니까. 그는 꼭 어렸을 때의 라비를 보는 것 같았다. 불행하고, 한심하고, 메말라있으며, 사랑을 혐오하지만 언제나 추구하고 있었다.




“그런 말을 하게 해서 미안해요. 내가 조금 더 잘했어야 했는데…….”




알렌은 남들을 대함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친절하게 라비를 대했다. 결국 그에겐 저 역시 스쳐지나가는 숱한 들쑤심 중 하나에 불과하리라고 생각하니 퍽 박탈감이 들었다. 차라리 탓해주면 좋겠다고 또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냥, 제 옆에 있어주세요. 귀에 닿는 목소리는 간절하게 떨렸다. 알렌은 애원했지만 라비는 자신이 없었다. 건조한 입술을 어렵게 뗐다. 




“내 생각에 우리는 그다지 오래 못 갈 거야.”


“그래도.”


.”


“그래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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