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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라비] 턴어라운드 8 fin “자, 이제부터 수를 셀 거예요. 하나, 두울, 셋……” 아이들이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크리스마스 날 받고 싶은 선물에 관한 기도를 하는 동안 알렌은 창틀에 기대어 새로 들어온 동화책을 심심풀이 삼아 넘겨보고 있었다. 부엌에선 빵을 굽는 듯 달콤한 냄새가 풍겨왔고 거실 중앙 커다란 트리에는 곧 각자의 소원쪽지가 걸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고아원 측에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이라곤 후원 받은 스웨터나 목도리, 털모자 따위가 전부였으니까 결과적으론 아이들에게 실망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알렌은 왠지 아이들의 순수함을 기만하는 행동을 하는 것 같아 어제부로 내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렬로 늘어선 조그만 뒤통수들을 응시하는데 지도 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미소가 꽤나 호감상의 중년이었다. “워커 씨도 ..
[알렌라비] 턴어라운드 7 라비와 마주쳐야만 하는 날짜가 다가올수록 알렌은 멍하니 있는 횟수가 늘어가고 있었다. 그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몇 개월 전 라비와의 만남으로 지난 과거들을 모조리 다 청산했으며, 또한 더 이상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려 그와 저녁식사를 하고 침대를 내주거나 선뜻 피아노를 쳐줄 수 있을 리가 만무했으리라. 알렌은 요즘 스스로를 성찰하는 일에 굉장히 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감정이 결단코 미련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마침내 라비의 존재 자체가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삶의 방식부터 시작해서 관철하는 가치관이나 신념, 걸어온 길까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애초에 서로 백해무익할 뿐인 관계였던 거다. 그래, 처음부터 이걸 깨달..
[알렌라비] 턴어라운드 6 알렌 워커의 최근 석 달은 평범함이 지극히 간절했던 기간이었다. 평범함이래봤자 뭐 별 건 없다. 끼니를 제때에 챙겨먹고 다가올 계절을 준비할 코트를 새로 산다든가 길어진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다듬는 일. 딱히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그는 남들과 같은 삶을 원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여태까지 뒤쳐져온 만큼의 공백을 메꿀만한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레슨을 늘리고 고아원 봉사활동을 다니며 일부러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보란 듯이 잘 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 대상이 누구인지 알렌은 의식하지 못했다. 얼마 전에는 고약한 감기를 얻었다. 요사이 갑자기 몸을 혹사시킨 대가 같았다. 열이 펄펄 끓고 눈앞이 흐릿해서 침대 위에 누워 골골대는 것 말곤 달리 방도..
[알렌라비] 턴어라운드 5 간밤의 정신적 피로가 누적되어서인지 머리는 수면부족으로 지끈거리고 있었으나 6시가 되자 습관처럼 눈이 떠졌다. 알렌은 성인 남성이 눕기엔 비좁은 소파 위에서 뻐근한 아침을 맞이했다. 어둠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고 새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오늘 같은 날은 조금 더 자도 되지 않을까. 그냥은 일어나고 싶지 않아 늦장을 부리다가 문득 ‘오늘 같은 날이 뭔데?’하고 자문해보았다. 그건 오히려 스스로를 나약하게 만드는 말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의 자기연민에 빠지기는 싫었으므로 결국 끄응, 자리에서 일어난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어쨌든 부지런히 커튼을 걷고 어질러진 거실을 치웠다. 방문을 열면 라비가 지난 새벽 침대 위에 눕혀놓은 모양대로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숙취가 심한 듯 종종 뒤척이며 잠꼬대로 앓는 ..
[알렌라비] 턴어라운드 4 그대는 고통으로부터 숭고해졌고 나는 그 숭고함을 꽃처럼 꺾고 싶었소. 라비가 쓰는 문장은 수사로 점철되어 있거나 너무 현학적이라서 종종 알렌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첫 베스트셀러였던 《OWEN》 역시 그러했다. 그래, 어떤 문화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트라우마 세대의 암울함과 비천함, 그리고 허무맹랑한 욕망의 가장 적나라하고 아름다운 향유이자 권태였다. 그 말조차도 무슨 뜻인지 긴가민가했지만 어쨌거나 그것만이 라비의 글을 설명했다. 라비를 처음 만났던 날 알렌은 밤새워 《OWEN》을 읽었으며 일말의 오기로 이후 세 번이나 복독했으나 결국 그 구절이 세간에서 찬사를 받으면서까지 함의하는 바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물론 워낙 문학에는 무관한 체질인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저 일회독 하는 것만으론 이해할 ..
[알렌라비] 턴어라운드 3 로망은 프랑스가 낯설 알렌을 위해 가이딩 해주겠다고 선뜻 말했지만 알렌은 그가 현재 얼마나 영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사양했다. 대신 기본적인 불어 회화 몇 마디가 정리된 메모지를 받았다. 흔한 인사말에서부터 긴급 상황 시의 도움 요청 매뉴얼까지 사려 깊게 적혀져 있었는데 그중 알렌이 가장 유용하게 사용한 것은 ‘얼마인가요?’와 ‘잘 먹었습니다’였다. 로망은 한 치의 여지없이 좋은 사람임에 분명했다. 다정할뿐더러 뛰어난 처세술로 원만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묘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알렌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로망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더라면, 지금보다 더 스스로가 구차하고 비참하게 느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간 로망의 배려 덕분에 여행은 순조로웠다. 지베르..
[알렌라비] 턴어라운드 2 운명적으로 만나 첫눈에 반해 사귀었고 누구나 부러워할 법한 멋진 연애를 했으며 권태기가 찾아왔을 땐 쿨하게 서로를 놓아주었다.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헤어진 연인 사이. 그래, 맞는 말이다. 그러나 라비와의 관계를 단순히 그렇게 일단락하기에는 조금 더 복잡하고 예민한 사정이 연루되어 있었다. 적어도 알렌에겐 그랬다. 라비의 첫 베스트셀러와 알렌이 즐겨 연주하던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제8번, 오후 두시 경의 베르가모트 향기, 그리고 마나의 죽음. 그 모든 것들이 라비를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알렌을 괴롭게 했다. 당시 그는 몹시 나약해져있었고 피아노 건반 위에 손가락조차 대지 못할 정도로 지독한 만성우울증에 시달렸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남을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때 ..
[알렌라비] 턴어라운드 1 여행한다고 생각해. 지금 하는 일은 전부 내려놓고. 알렌은 한 번도 외국에 나가본 적 없지? 그렇게 말하는 리나리의 목소리가 상기되어 있었다. 워낙 다정한 사람이니까 줄곧 걱정하고 있었던 거겠지. 알렌은 미안함과 고마움의 인사를 따로 전하는 대신 그냥 가볍게 웃었다. 유명 항공사의 비즈니스석을 예매하겠다는 리나리를 만류하고 선편을 고른 그는 여행 가방을 챙기면서 문득 자신이 가진 것이 얼마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껏해야 칫솔 세트와 갈아입을 옷 몇 벌, 낡은 작곡노트, 그리고 지갑. 만약 피아노가 가방에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면 챙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정도면 일 중독이야, 하고 리나리가 또 잔소리를 할 테지만 그만큼 피아노는 알렌의 전부였다. 프랑스로 가는 이유는 단순했다. 이번에 사운드트랙 작곡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