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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라비] No Thanks Life












남자의 올화이트 정장에서는 짙은 향수 냄새가 났다. 추측하건대 파코 라반의 원 밀리언. 애송이치고는 제법 독한 것을 쓴다는 게 녀석의 첫인상이었다. 기껏해야 십대 후반,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았을 앳된 얼굴은 세상만사의 더러움과는 일절 무관해보였으니까 라비는 그 점이 수상했다. 



온갖 추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곳은 도시의 찬란함 뒷면에 숨어 있는 그림자 구역이었다. 모럴이 무너지고 눈이 멀어 더욱 본능적이고 자극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들. 범람하는 허무와 채워지지 않는 갈증 가운데 품위라곤 찾아볼 수 없었으며 대부분 취해있거나 죽어가거나 둘 중 하나였다. 면전의 남자는 과연 어느 쪽일까. 입에 대고 있던 술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라비는 남자와 눈을 가만 마주쳤다. 남자의 완만한 눈매는 충분히 부드러웠지만 결코 온유한 느낌을 주진 못했다. 온몸에 긴장이 곤두섰다.




“당신이 라비인가요?”




남자는 정중하게 목례를 하더니 대뜸 그리 질문했다. 동시에 남자의 뒤를 따르던 풍채 좋은 사내들이 순식간에 라비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포위했다. 그건 어딜 보나 위협이었다. 한 치의 틈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바싹 붙어오는 통에 위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때 라비의 두뇌는 어느 순간보다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출구까지는 50미터 정도. 육탄전으로 이 덩치들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인파 속에 몸을 숨길 수는 있을 것이다. 머리를 굴리는 동안 남자는 흔들림 없이 라비를 주시하며 대답을 종용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오리발을 내미는 게 불가능할 텐데도 라비는 여유로운 척 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러니까, 심리전이었다. 




“…그쪽 이름부터 대는 게 예의 아니신가? 못 배운 도련님은 아닌 것 같은데.”


“아, 실례했네요. 죄송합니다.”




남자가 격식 있게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사실 남자의 이름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 중 일부였고,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중요한 건 단 1초라도 시간을 벌었다는 것. 직업 특성상 볼 꼴 못 볼 꼴 다 목도하고 살아온 라비에겐 일련의 경험으로 터득한 감이 하나 있었다. 자신할 순 없으나 그 감으로 목숨을 구한 적도 여럿 되었더랬다. 그리고, 지금 그것이 또다시 말하고 있었다.




“제 이름은 알렌 워커라고 합니다.”




—도망쳐라.



그 순간, 라비는 둘러싸고 있던 사내 한명의 사타구니를 걷어차고 허술해진 그 틈으로 몸을 던졌다. 소파가 뒤로 넘어가고 테이블이 와장창 뒤집어졌다. 깨진 술병 조각을 지르밟으며 이를 악문 채 무작정 내달렸다. 군중 사이를 밀치고 파고들어서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꺄악, 새된 비명이 들렸다. 멀지 않은 뒤에서 추격하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생애 그리 미친 듯이 뛰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 노력이 부질없게 금방 따라잡히고 말았다. 팔이 뒤로 거칠게 꺾이고 그대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면서 라비는 네놈은 천성이 방탕하니 술과 여자를 멀리하라던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아. 그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으윽, 하고 고통스런 신음을 지르는 사이에 대여섯 정도 되는 거구들이 위로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뻗어진 손은 사지를 붙잡았고 머리통을 바닥에 박게 만들었다. 차가운 대리석에 인정사정없이 뺨이 뭉개지자 절로 아야야야… 하고 앓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렇게 포박당해 옴짝달싹도 못하는 라비에게 알렌은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머리카락부터 정장까지 온통 순백색이더니 심지어는 구두마저 새하얀 에나멜이었다. 그것에서 집착에 가까운 결벽을 느꼈다.




“시간 끈다고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나요?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나더군요.”


“…일단 잔머리가 내 직업병이라.”




미끈한 구두 앞코로 알렌이 라비의 머리통을 가볍게 툭툭 쳤다. 무슨 어린아이가 호기심에 더러운 걸 건드려보는 행동 같았다. 움직이지 못하게 눌려 있었으므로 라비는 그의 발목까지 밖에 볼 수 없었다. 표정을 읽을 수 없으니 불안이 엄습했다. 자꾸만 몸을 바르작거리니까 내리누르는 손들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게 또 아파서 미간이 찡그러졌다.




“그래서, 이제 나를 어떻게 할 셈이지?”




라비가 버겁게 물었다. 딱히 진짜로 궁금해서 물은 건 아니었다. 대략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창고 같은 데에 끌려가서 고문당하거나, 야산에 생매장 당하거나, 아니면 손발이 묶인 채로 바다에 빠지거나. 단지 라비는 조금 자조했다.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시다가 맞이하는 죽음이라니 너무 본인다운 마지막이라 헛웃음이 나오는데, 알렌은 그런 라비가 재밌다는 건지 우습다는 건지 모를 느낌으로 피식했다. 아마 그도 소문의 ‘라비’를 그림자 구역의 한낱 나이트 클럽 안에서 잡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알렌은 조곤조곤하게, 그러나 힘 있게 말했다.




“보안만큼은 철저하다고 생각했는데 일개 정보꾼 따위가 우리 가문에 대해 거기까지 알고 있었다니,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비꼬는 건가.”


“아뇨. 칭찬.”




당신의 능력을 인정하겠단 소리예요. 알렌이 말하는 그 능력이라 함은 뒷세계에서 정보를 파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유용한 것이었다. 완전 기억.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은 것을 결코 잊지 않는 초월적인 기억력. 라비는 자신에게 이토록 알맞은 능력은 없을 것이라 자부해왔고 정말 누구보다도 잘 활용했다. 앎이 곧 힘인 이 판에서는 가장 많은 걸 알고 있는 자가 권력을 휘두른다. 다시 말해, 라비는 곳곳에서 탐내는 인재이자 동시에 적이란 소리였다. 



정치라는 게 마치 꼭 호수 위의 백조 같아서, 겉으론 번지르르해보일지 몰라도 실상은 난잡하고 조악한 패권다툼에 불과했다. 정세를 보는 눈이 밝은 그는 금방 어느 가문이 전망 있고 장차 강력해질 지 추려냈으며, 그 결과 선택한 게 노아 가였다. 노아 가는 거래마다 적지 않은 수고비를 챙겨주었고 매 때 목숨의 위협을 받는 라비를 보호해주었다. 애초에 히피의 핏줄인 라비에게 절대적인 소속이란 있을 수 없었지만 뭐 굳이 말하자면 협력관계인 셈이었다. 



그리고 아마 가장 최근 노아 가에 팔아 넘겼던 정보가 워커 가의 것이었다. 수장인 마나 워커가 쓰러졌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이렇게 직접 그 양자께서 복수를 위해 행차하실 줄은 미처 몰랐지. 라비는 그 행동력에 속으로만 감탄했다. 알렌은 라비의 앞에 쪼그려 앉더니 턱을 괴고 나긋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두 가지 선택지를 드릴게요. 일번, 저와 손을 잡는다. 이번, 여기서 혀를 뽑히고 사지가 절단되어 흙바닥에 생매장 당한다.”




그 단정한 입에서 나오는 말은 잔혹하기 그지없어서 라비는 절로 식은땀이 났다. 불공정한 양자택일. 이건 고르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알렌은 라비에게 선택할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지금 강요하고 있는 거였다. 따라서 라비가 답할 건 당연했다.




“나야 일번이지.”


“전 라비처럼 비겁한 사람이 좋습니다.”




말이 잘 통하거든요. 







*   *   *







알렌이 원하는 것은 단순했다. ‘단 한 방에 노아를 무너뜨릴 수 있는 회심의 역점’. 그 말에 라비는 기함했다. 그런 극비사항을 한낱 브로커인 나한테 알려줄 리가 없잖아. 그럼에도 알렌은 불만족스러워 보이는 얼굴을 풀지 않았다.



라비가 클럽에서 알렌에게 붙잡힌 날. 그러니까 워커 가에 협력하기로 한 날로부터 정확히 한 달이 지났다. 여태까지의 삶에서 많은 것이 변화했는데 그중 가장 큰 부분이 바로 어딜 가든 알렌과 동행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건 곧 행동에 제약이 생기고 이전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다는 의미기도 했다. 이는 라비가 도망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라비와 워커 가의 동맹 소식이 일파만파 퍼져나간 가운데 노아 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암살을 시도해왔다. 아마 노아 가의 온갖 치부를 알고 있는 라비의 입을 막고자 그렇게 필사적인 것이리라. 여태까지 세 번의 납치 시도와 다섯 번의 교통사고, 그리고 두 번의 총격 위협이 있었으며 가장 최근의 사건은 발신인 불명으로 워커 가에 도착한 의문의 협박 편지였다. 우리는 언제나 너를 지켜보고 있으며 네가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너를 죽이려 할 것이라고. 배신자의 최후를 기대하라는 마지막 문장까지 읽어 내려간 라비는 안색이 새파래졌다. 노아 측에 있었으니까 그들의 결집력이나 잔인성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패밀리’를 중시하는 그들은 그 무엇보다 배신을 중죄로 여겼고, 사지를 찢어발긴다는 말이 아쉬울 정도로 끔찍하게 보복했다. 편지에 적힌 내용은 단순히 으름장만이 아닐 것이다. 라비는 언젠가 노아 가를 배신한 조직원의 사체를 본 적 있었다. 사람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이였다. 그게 자신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치고 손이 덜덜 떨리는데, 옆에서 알렌은 태평하게 말했다.




“라비,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인기가 많네요.”


“젠장,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이쪽도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손을 잡게 되었다고 설명하면 좀 봐주려나. 가련하게 머리통을 부여잡고 절규했지만 아무래도 영 가능성 없었다. 알렌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밀크 크레이프 케이크를 포크로 찍어 눌렀다. 여러 겹의 크레이프가 무너지고 사이의 생크림이 먹음직스럽게 비어져 나왔다. 그 달콤한 조각을 한입 물며 그는 책임지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걱정 말아요. 저는 지킬 수 없다면 애초에 손에 넣지 않습니다.”




자신보다 어린 소년이 하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라비는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 날 이후 알렌은 모든 연회에 라비를 보란 듯이 대동했다. 마치 이 사람이 워커 가의 일원이다, 하는 듯이. 단순한 비즈니스적 협력관계가 아닌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알렌은 조금 더 친절했고 상냥했으며 신사다웠다. 라비는 그게 또 아니꼬웠다. 이 짓도 역겨워서 못해먹겠군. 그 말에 알렌이 코웃음 쳤다. 해들리 가 장녀의 열여덟 번째 생일 파티를 끝마친 후 돌아가는 리무진 안이었다. 알렌은 해들리 부인에게 라비를 ‘피를 나눈 형제와도 같은 사람’이라고 소개했고, 그때 라비는 입에 머금은 와인을 코로 뿜을 뻔했다.




“당신이 노아에 우리 가문을 팔아먹은 덕에 마나가 쓰러졌어요. 그 죗값 치러야죠.”


“그래서 지금은 괜찮으시다냐.”


“아무렴요. 괜찮지 않다면 전 라비를 보자마자 이마에 구멍을 뚫어버렸을걸요.”




이, 미친 파파콤……. 라비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알렌이 평소 마나 워커에게 보였던 맹목적인 애착을 생각하면 충분히 일리 있는 얘기였다. 새삼 마나 워커의 무사 건승함을 다행으로 여기며 라비는 차창에 힘없이 이마를 기대었다. 크게 한숨 쉬자 알렌의 시선이 물끄러미 느껴졌지만 그냥 무시했다. 이젠 아예 될 대로 되라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바람 부는 대로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어디로든 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알렌 워커는 지금 라비의 인생에 몰아닥친 큰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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