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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라비] 해의 그림자 2







6.


미사는 내내 지루했다. 두 손을 모으고 중얼중얼 기도문을 외는 자들 사이에서 알렌은 반쯤 넋을 놓고 있었다. 여기 있으면 멀쩡하던 사람도 금방 무언가에 홀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적응되지 않는 엄숙한 공기에 괜히 여러 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이 지긋한 신부가 연신 강요하는 믿음이니 은총이니 하는 것엔 영 관심 없었고,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미사가 끝나고 나면 라비에게 안타깝지만 당신의 전도는 실패였노라고 말해줄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새하얀 사제복을 입은 라비가 성경 강독을 위해 단상 앞에 서자 알렌은 그러한 의욕을 상실하고 멍해졌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진중한 자태로 전하는 신의 전언들. 라비의 목소리는 일관된 높낮이였으며 듣기에 거슬림이 없었다. 그건 정말 나무랄 데 없는 성직자의 모습이었다. 알렌이 아는 그는 언제나 잠에 취해있었고 품위 있다고 말하기엔 다소 경박한 구석이 있었다. 요컨대 알렌에겐 그 모습이 낯설었던 거였다. 



…이상,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강독을 끝낸 라비는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미사당 안의 모든 이들이 한 차례 묵도했고 알렌은 라비의 뒷모습을 눈으로 끈질기게 쫓았다. 그때, 갑자기 라비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시선이 들키자 마치 무례라도 저지른 것처럼 뜨끔했으나 알렌은 시침을 떼거나 피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똑바로 바라보고 있노라니 라비가 싱긋 웃었다. 예의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그런데 어쩐지 지금은 조금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순간 바싹 약이 올랐다. 불쾌한 무언가가 안쪽을 어지럽히듯이 마구 번져가고 있었다. 그게 알렌이 끝까지 미사에 집중하지 못한 이유였다.





7.


장장 두 시간에 걸친 미사가 끝나고도 알렌은 한참동안 해산하는 인파에 이리저리 떠밀려 다녔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정신없이 헤매고 있을 때 누군가 힘 있게 팔을 잡아챘다. 라비였다. 그는 어느 새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솔직히 여기 끌려온 것만도 맘에 안 드는데 미사가 생각보다 더 재미없고, 거기다 라비의 기분 나쁜 모습까지 보게 되어 알렌은 심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게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난 모양이었다. 라비가 많이 지루했던 모양이라며 하하 웃었다. 알렌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부루퉁히 걸음을 재촉했다.



복도를 지나면서 라비는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곳의 모두가 그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먼저 다가와서 목례를 하거나 성호를 그었고 라비 역시 두 손 모아 축복을 빌어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괜히 마음이 비틀리기에 알렌은 자꾸 신발코로 바닥을 콩콩 찧었다. 그러는 동안 좀 전 미사의 신부가 그들에게 걸어왔다. 눈두덩이 거뭇하고 왜소한 노인이었다.




“여기 있었느냐, 라비.”




라비에게 볼 일이 있는 듯 하던 신부는 알렌의 앞에 돌연 멈춰서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마나 워커의 양자인가? 다짜고짜 그리 물으며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에 알렌이 당황스러운 눈짓을 하고나서야 라비는 그를 소개해주었다.




“아. 말을 안 했네. 이쪽이 내가 말했던 그 할배.”


“…안녕하세요.”




알렌이 엉거주춤 인사했다. 그러고 나면 무얼 해야 할지 몰랐다. 신부는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학교는 잘 다니는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뭐 그런 것들을 물었다. 하나하나 대답해주면서도 이런 질문을 받는 건 처음이라 알렌은 약간 멋쩍어졌다. 마나와 함께 살 적엔 온종일 집에만 있었던 데다가 라비야 워낙 무관심한 성정이었으니까. 누군가에게 자신의 안부를 보고한다는 건 생각보다도 민망한 기분이었다. 어쨌거나 모두 덕분이라며 알렌이 예의를 차리자 신부는 신학교에 들어가 성품성사를 받는 게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제안했다. 알렌은 정중히 거절했다. 신부도 그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8.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라비는 알렌에게 크레페를 사주었다. 미사를 잘 들은 상이라고 했다. 그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애 취급 하는 게 썩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고작 크레페 따위에 기분이 풀릴 리는 없었지만 알렌은 잠자코 건네받았다.




“그나저나 아까 나 어땠어?”


“안 어울렸어요.”


“얼마나?”


“비둘기가 백조인 척하는 느낌으로요.”





9.


알렌은 라비를 보호자라고 여기지 않았다. 다만 그건 서류의 문제였다. 형식적인 후원관계일지라도 사실상 라비는 연고 없는 알렌의 유일한 보호자였다. 둘 다 그 사실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므로 여태까지는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알렌의 학교에 라비가 호출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라비가 편입시켜준 학교는 근방 최고의 명문으로 부유한 귀족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곳이었다. 아마 제 딴에는 신경써준다고 골랐겠으나 알렌에겐 심히 부담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워커’라는 성씨는 이미 귀족들 사이에서 유명했기 때문이다. 한때 왕실을 위협할 정도로 큰 권력을 휘둘렀지만 15년 전 반란 이후 패망한 가문. 배신자라는 낙인은 워커 가가 멸문하고도 집요하게 쫓아다녔다. 알렌이 워커인 이상 그로 인한 수모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 세계라는 게, 알렌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좁았다. 그는 말하지 않은 그에 관한 이야기들이 마치 가십기사처럼 빠르고 가볍게 소비되었던 것이다. 마나 워커의 친자가 아니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가톨릭 재단에 후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까지 들먹였을 땐 솔직히 조금 놀랐다. 물론 알렌은 그게 딱히 자신의 약점이 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니까 아이들은 오히려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단순히 가문을 욕하던 언행은 점점 개인을 향한 인신공격이 되었고 끝내 타자에까지 그 화살이 향했다. 



마나 워커가 널 입양하고 뒈졌으니 지금 널 맡고 있는 사제 역시 그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마나 워커처럼 역병에 들거나 어디 뒷골목에서 배에 칼이 찔려 장기를 쏟을지도 모르지. 주위를 둘러싼 채 와하하 웃었다. 알렌은 무표정했고 아무 말 없었으며, 그 다음 순간 곧장 주먹을 날렸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패대기쳐진 소년의 위로 올라타 마구잡이로 폭행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한참 놀라서 굳어있던 주변 학생들이 뒤늦게 알렌을 뜯어말렸지만 이미 몸싸움은 걷잡을 수 없었다. 주먹이 머리통을 가격하고 무릎이 배를 찍었다. 알렌 역시 지지 않고 멱살을 부여잡아 내동댕이쳤다. 결국 담임교사가 등장하고 나서야 상황이 정리되었다. 헉헉 숨을 몰아쉬자 입가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그곳에 있던 모두가 한 통속이었으므로 모든 잘못은 알렌의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10.


면담을 마치고 돌아가는 자동차 안에서 두 사람은 침묵했다. 알렌은 창문 바깥을 내다보는 척 하면서 흘끔 라비의 눈치를 보았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옆모습은 지극히 무감해보였다. 나무라거나 화내지 않았고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가 정적을 깬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귀찮은 일은 벌이지 마. 내가 너 보호자지, 부모노릇 하는 사람은 아니거든. 심상한 어투로 그렇게 하는 말에 알렌은 순간 울컥했다. 라비의 무심함은 편했으면 편했지 결코 서운했던 적은 없었는데, 예민해진 탓일까 자꾸만 날카로이 곧서고 있었다. 기실 알렌은 아직 그런 감정을 숨기는 것에 서툴렀다.




“오지 않아도 됐어요.”


“그 녀석들이 뭐라고 했는데? 너더러 새치머리래?”


“몰라요.”


“보나마나 워커 남작의 욕을 했겠군.”


“…내가 저주를 몰고 다닌대요.”




시가지를 통과하자 차체는 더욱 덜그럭거렸다. 알렌은 퉁명스러웠으나 라비는 여유로웠다. 생각해보면 매번 이 패턴이었다. 알렌은 깊게 숨을 골랐다. 마나가 죽었으니 이제 라비 차례래요. 나와 함께 있는 자들은 전부 저주를 받을 거라고 했어요. 내키지 않았지만 어쩐지 절로 술술 불고 있었다. 전말을 설명하면서도 알렌은 자신이 왜 이 자에게 이렇게 자세히 말하고 있는지 몰랐다.



라비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에 알렌은 그가 과연 어떤 대답을 할지 약간 긴장했다. 문득 자신이 그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너 신은 안 믿으면서 그런 건 잘도 믿는 구나.”


“…….”


“그런 도발에 넘어가서 네게 남는 게 뭔지 잘 생각해봐.”


“…제가 잘못했다는 거예요?”


“멀쩡한 애를 개 패듯 패놨는데 그럼 칭찬이라도 해줘?”




알렌은 차 안만 아니었다면 벌떡 일어나고도 남았을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천연덕스러운 태도 앞에서 분노를 터뜨려 봤자 소용없는 짓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어쩌지 못했다. 그저 서슬 퍼렇게 라비를 노려볼 뿐이었다. 둘이 처음 마주했던 날 이후로 실로 오랜만에 보는 눈이었다. 라비는 애늙은이처럼 구는 알렌을 그토록 격정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에 대해 퍽 유쾌함을 느끼면서 일부러 실실 말을 돌렸다. 알렌이 제게 전하려던 본질을 눈치 못 챈 것이 아니다. 그냥. 그게 재밌었다.




“뭐, 내 얘기에 발끈해서 복수해준 것 정도는 조금 감동이야.”


“당신 때문에 그런 거 아니라고!”




끝내 버럭 소리를 내지르고 나서 알렌은 씩씩대다가 입을 꾸욱 다물었다. 그리고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쿵쾅거리며 제 방에 들어가 문을 잠구는 것이었다. 하인들이 주춤주춤 망설이다가 방문을 두드려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저런, 아직 애구만. 하인들이 내어온 뜨거운 우유가 담긴 머그잔을 받아든 라비는 혀를 끌끌 차며 난로 앞 소파에 털썩 앉았다. 학교에서 알렌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는 물음에 대답 대신 단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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