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취하되 결코 사냥하지 마라.’
마족으로 살면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었다. 그 의미가 갖는 모순에 대해서 라비는 몰이해했지만 딱히 주어진 불문율을 거스른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면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것이 40년 정도 된 어머니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인간은 우리의 식량이며 그만큼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고. 라비에게 삶의 귀감이 되어준 두 개의 문장은 형태는 달랐으나 대충 비슷한 느낌이었다. 요컨대, 마족이 인간의 우위임에 근간한 말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에는 한 치의 오류가 없어보였다.
좁은 창문 사이로 드는 달빛에 먼지가 나풀거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라비는 작게 재채기했다. 으슬으슬 한기가 도는데 보온할 만한 것이 없어 더욱 몸을 웅크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막연하게 기억을 되짚어보았으나 며칠을 쫄쫄 굶은 배에서 꼬르륵 소리만 났다. 그게 또 서러워서 눈물을 찔끔 흘렸다. 자그마치 일주일 째였다. 미사당의 창고에 옴짝달싹 못하고 갇혀버린 토끼 신세가 된 것은.
이 황당하고도 끔찍한 사태의 전말인즉슨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라비의 인간사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의 그는 불필요한 사냥은 하지 않는 편이었고 가끔 씩의 폭식을 제외하면 언제나 최소한의 식사만을 했다. 본래 흡혈귀라는 일족이 마계에서도 워낙 괴짜라서, 개체유지라느니 피의 품질을 따지는 녀석들이 비일비재했으니까 라비라고 다를 건 없었다. 여하간 그날은 마물들이 설치기 좋은 만월이었으며 때마침 허기진 그의 눈에 길 잃은 한 행인이 들어왔던 것이다.
먹음직한 얼굴과 신선한 신체를 가진 백발의 소년. 소년은 마치 대놓고 차려진 밥상처럼 인적 드문 숲속을 무방비하게도 홀로 지나고 있었다. 목표를 포착한 라비는 순식간에 그 앞으로 이동했고 우연히 지나가는 사람같이 굴었다. 그러면 그쪽에서 먼저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요, 하고 불러 세우는 목소리는 앳된 티가 역력했으니 라비로선 대수가 아닐 수 없었다. 음흉한 속내를 감추며 자연스럽게 돌아보았다. 고개를 갸웃하고 모른 체 눈을 꿈뻑였다.
“저 혹시, 길을 여쭐 수 있을까요?”
가까이서 본 소년은 위에서 봤을 때보다도 훨씬 반반한 용모였다.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에도 좋듯 마족 역시 조금이라도 더 젊고 고운 인간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까다로운 흡혈귀의 잣대로 평가하건대, 상당히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로지번리에 갈 수 있나요? 그렇게 물으며 서슴없이 다가오는 소년에게 라비는 서글서글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응대했다. 목적지가 같으니 그곳까지 동행하자는 말에 소년은 더없이 환해졌다.
기실, 보통의 정신 제대로 박힌 인간이라면 마물이 우글거린다는 숲 속에, 그것도 만월의 밤에 어슬렁거리고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소년은 낯선 이를 마주하고도 일말의 의심이 없었으니 이때쯤 진작 눈치를 챘어야 했다. 어쨌거나 몇 마디 소개말을 나눈 두 사람은 계속해서 걸었고 점점 더 깊은 숲으로 들어섰다. 워낙 고목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있어 좌우가 분간 안 될 지경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연신 같은 곳을 맴도는 것 같은 기시감이 잇따랐다. 묵묵히 라비의 뒤를 따르던 소년이 돌연 멈춰선 것은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경과했을 때였다.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가 머뭇대며 입술을 달싹였다. 라비, 여기 아까 지나갔던 길 같은데요. 그에 라비도 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는 얼굴은 달빛을 받아 더욱 창백했다.
“…그런데, 알렌은 어째서 오밤중에 이 위험한 숲을 지나면서까지 로지번리로 급하게 가려는 거야?”
마치 일부러 질문을 무시하는 것처럼 화제를 돌리는 게 다소 미심쩍었지만 알렌은 그다지 대수로이 여기지 않은 듯 했다. 잠깐 고개를 갸웃하다가 막힘없이 말했다.
“아, 주교님께 편지를 전해드릴 것이 있어서…. 그러고 보니 라비는요?”
“나는 찾고 있는 게 있거든.”
그때, 라비가 일직선으로 알렌에게 다가왔다. 부쩍 가까워지는 거리감에 알렌은 주춤 뒷걸음질 쳤으나 금방 라비의 손아귀에 팔뚝이 붙잡히고 말았다. 마르고 기다란 손가락은 보기와 다르게 상당한 악력이 있었다.
알렌이 당황해하는 사이 라비는 그를 와락 껴안았다. 어깨에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들이쉬면 신선한 향이 났다. 얇은 살갗 아래에 있을 새빨갛고 맑은 것이 마구 구미를 자극하고 있었다. 미안, 배가 고파서 더는 못 참겠다. 숨기고 있던 송곳니를 드러냈다. 간만에 맘에 드는 인간이었으니까 가능한 신속하고 아프지 않게 끝내 줄 생각이었다. 입을 쩌억 벌려 그 날카로운 이빨을 알렌의 연한 목덜미에 박아 넣으려는 순간, 보이지 않는 거센 파동이 라비를 화악 뒤로 밀어뜨렸다. 그는 그대로 튕겨져 나가서, 바닥에 꽈당 나동그라졌다.
“아야야야….”
느닷없이 엉덩방아를 찧은 충격으로 허리를 매만지고 있는데, 넘어진 바닥에 별안간 육망성의 결계진이 그려졌다. 그것의 가장자리에서 뿜어져 나온 정체불명의 빛은 라비의 주위를 에워싸며 일정한 원 안에 가두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그가 어리둥절해서 눈을 화등잔처럼 크게 뜨노라니, 알렌은 방금 전의 습격으로 흐트러진 옷깃을 여미며 라비를 향해 생긋 웃어보였다.
“잘 속였지만 안타깝네요. 저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거든요.”
그 말에도 이해가 안 되는 건 매한가지였다. 평생을 포식자로 살아온 라비에게 ‘붙잡힌다’라는 상황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 그 상대가 인간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보이지 않는 힘이 계속 전신을 짓누르고 있어 손가락 끝도 움직이지 못하는 가운데 알렌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혼란에 빠진 라비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는 상쾌한 얼굴은, 필시 사냥을 성공한 헌터의 것이었다. 바싹 소름이 돋았다. 그때 처음으로, 라비는 피식에 대한 공포감이란 걸 통감했다.
“전 바티칸에서 파견된 견습 구마사제입니다. 최근 로지번리에서 수십 차례 발생한 피습사건의 범인은 역시 당신이었군요.”
굳어있던 머리가 그제야 회전하기 시작했다. 만월의 밤에 숲을 혼자 지나고 있었던 것도, 낯선 자를 대하면서도 전혀 의심하는 기색이 없었던 것도, 주교에게 급하게 전해야 할 편지가 있단 것도 그렇게 생각하니 전부 다 퍼즐처럼 아귀가 들어맞았다. 이윽고 알렌이 품안에서 청금석이 박힌 은단도를 꺼내자 라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 칼로 무얼 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마음이 다급해져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억울함을 성토했다.
“잠깐, 잠깐! 뭘 말하는 거야. 그거 나 아니야!!”
“연기 하나는 출중하다는 건 잘 알겠네요. 방금 전까지 저한테 같은 짓을 하려고 하더니 발뺌입니까.”
“나는 이 동네에선 인간을 잡아먹은 적 없다구, 믿어줘!”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에도 알렌은 실로 완고했다. 은단도로 성호를 그으면 날카로이 벼린 칼날이 달빛을 받아 더욱 시리게 빛났다. 그 순간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변명은 일단 그 입부터 막고서.”
—그러니까, 말 그대로 입을 막겠단 거였다. 라비는 그 뜻이 정말 ‘아무것도 못 먹게 한다’는 것일 줄은 몰랐다.
그 날 새벽 알렌은 라비를 로지번리에 위치한 성당으로 데려갔다. 언제는 길을 잃었다더니…. 라비는 또 한 번 배신감에 몸서리쳤다. 이중의 결계가 쳐진 미사당 창고에 갇히면서 이상한 주문을 건 목걸이가 강제적으로 채워졌는데, 알렌이 말하길 그것은 성령의 힘이 깃든 성물로써 착용자가 부정한 짓을 못하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했다. 라비가 그게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건 굶주림을 참지 못해 들쥐 한 마리를 잡아 그 피를 빨았던 둘째 날의 밤이었다. 들쥐의 피가 혀에 닿자마자 이루 말할 수 없이 역겨운 감각이 올라왔다. 온몸에서 필사적인 거부반응이 일어났고 결국 넘긴 그대로 토해내야 했다. 배에 든 것이 없었으니까 투명한 액만을 뱉을 뿐이었지만 연신 고통스러운 기침을 켈록거렸다. 실로 고약한 주술이었다. 그때는 너무 서러워서 진짜 체면 다 내려놓고 울 뻔했다.
이쯤 되니 그동안의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스치듯 떠올랐다. 낳아주신 어머니, 마음껏 한심하게 살아가라고 가르쳐주신 아버지, 그리고 잔소리가 심했던 영감님…. 그러다보니 마치 죽음을 목전에 둔 듯한 기분이길래 고개를 휘휘 내저어 떨쳐내었다. 누명이 벗겨지면 풀어주겠다던 알렌은 까먹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라비를 방치하고 있었다. 어쩌면 굶겨 죽일 속셈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외로움에 사무치게 고독사 시킨다거나. 퀴퀴한 먼지가 수북하기만 한 창고는 근 일주일 동안 어떤 인기척도 없었던 것이다.
배도 고프고 체력이 방전돼서 라비는 알렌을 기다리다가 자꾸 꾸벅꾸벅 졸았다. 불현듯 눈꺼풀이 떠진 것은 한참 뒤의 심야였다. 바깥에서 뭔가 어수선한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고 있었다. 함성 같기도 하고 비명 같기도 했다. 눈을 비비고 어둠을 더듬으며 창가에 가까이 다가섰다. 워낙 먼 곳의 것이라 그 소재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예사 일이 아님은 알 수 있었다. 이중의 견고한 결계 너머로 희미하게 동족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마족이었다. 그것도 인간을 수없이 잡아먹고 오래 묵은 상위 마족. 그 순간, 눈이 크게 떠졌다.
어쩌면 빠져나갈 수 있을 지도! 기대감에 벅차올랐다.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녀석의 기척은 마을을 헤집어 놓지 않고 뚜렷한 목표를 갖은 채 움직였는데, 그 방향이 바로 이쪽의 성당이었다. 사제들의 기도문과 성당의 종소리는 마족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으니까 아마 일부러 모두가 잠든 새벽을 틈타 습격한 것이다. 이윽고 건물이 와장창 무너지는 굉음이 났고 벽이 흔들렸다. 비틀비틀 중심을 잡고 다시 창밖을 내다보면 가까운 하늘에서 녀석의 정체가 보였다. 적갈색의 비늘을 가진 와이번이었다. 타고난 멍청함과 난폭성 때문에 200년 전 용족에서 추방당한 이들이었다. 이런 숲 속에 숨어서 힘을 모으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라비는 그들을 썩 좋아하는 편은 못 됐으나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와이번은 제일 먼저 강철 같은 꼬리로 종탑을 박살내었다. 허무하게 무너진 잔해가 떨어져 2차적 붕괴를 초래했다. 석고로 된 성모상이 산산조각나고 십자벽고상이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성당의 성물들이 완전 파쇄된 덕택에 창고를 둘러싸고 있던 결계가 점차 약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허물어진 벽 틈새로 시원한 바깥공기에 감격하며 라비는 청명한 새벽달을 우러러 보았다.
“이곳에서 동족의 기운이 느껴지더니, 네놈인가?”
낮고 묵직하게 울리는 무게감 있는 목소리였다. 용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인데, 흡사 동굴에서 내는 것 같기도 했다. 뭐 애초에 인간에게 붙잡힌 것을 용족이 구해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쩐지 요사이 기이한 경험을 다 하게 된다. 와이번은 저공비행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날개를 다 펼치니 거의 10미터에 육박했다. 거센 착륙풍이 불어서 라비는 중심을 잃지 않도록 버텨내야 했다.
“어이! 탈출하는 것 좀 도와줘!”
입에 두 손 모아 반갑게 외쳤다. 그에 와이번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금구슬 같은 눈동자로 라비를 잠깐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별로 크게 관심 없는 듯한 기색이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무감하게 말하는 것에 라비는 약간 조급해졌다. 하기야 흡혈귀와 용이 막역한 관계인 것도 아니거니와, 그럴 명분 역시 없기는 했다. 하지만 동족임을 알면서도 저렇게 남일 보듯 구는 태도는 퍽이나 기분 상했다.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구실을 찾아 머리를 굴리고 있으려니 그쪽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그건 상황과 딱히 관계없는 물음처럼 보였다.
“우리들이 가장 빠르게 강해지는 법을 알고 있나?”
“어?”
마음 같아선 지금 궁금한 건 그게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건 없었으니까 라비는 적당히 고민하는 척했다. 보통 마족이란 선천적으로 고결함과 힘을 타고나는 존재다. 그에 따른 계급이 정해져 있었으며 몇백 년을 마물로서 살면서 요기 따위가 강해질 수는 있겠지만 고작해야 어느 정도였다. 요컨대 허황된 말이란 소리다.
라비는 머뭇머뭇하다가 영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녀석이 원하는 대답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와이번은 오만하게 콧김을 내뿜었다.
“무지막지하게 잡아먹고 보는 거다. 먹이로부터 마력을 흡수하는 거지.”
순간, 얼핏 좋지 않은 예감이 스쳤다. 아마도 틀리길 바라지만 거의 빗나간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와이번은 태생이 용족이긴 하지만 품위가 없고 지능이 떨어져서 하급 마물로 분류되어 왔다. 그럼에도 용족의 권세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소속감과 연대를 중시하는 폐쇄적인 귀족의 형태를 띈 일족이기 때문인데, 그게 맘에 걸렸다. 그들에게 추방이란 가장 큰 형벌이었다. 그러니까, 웬만한 중죄가 아니라면. 피를 우선하는 일족이니 만큼, 예를 들어, 뭔가, 동족을 해했다던가.
생각해보면 고작해야 와이번 따위가 마을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단 소리는 못 들어봤다. 그걸 깨닫자 라비는 헉, 하고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일족에서 쫓겨난 지 겨우 200년 동안 이토록 강해졌다고? 일반적으론 불가능했다. 불길함을 느끼고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자 와이번이 위협하듯 긴 목을 꼿꼿이 펴고 우렁차게 울었다. 일순 천지가 뒤흔들리는 엄청난 기세였다. 여느 인간들만큼이나 약해진 지금의 라비로선 그 앞에 대항할 여지가 없었다. 쩌억 벌린 아가리에 팔뚝만한 엄니를 보면서 생각할 틈도 없이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것은 매우 찰나였다. 와이번이 달려든 것도,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것도, 그리고 사방에서 강렬하고 불쾌한 빛이 느껴진 것도.
익숙한 엄습이었다. 아마도 최근 라비는 이것에 같은 방식으로 당했다. 와이번의 바로 밑바닥에 나타난 결계진. 이전에 본 것과 대체적인 구조는 비슷했지만 비교 불가하게 크고 복잡했다. 녀석도 당황했는지 마구 몸부림쳤다. 물론 결계는 몹시 견고했으므로 허사였다. 넋이 나가서 일어날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는 라비에게 하얗고 검은 옷을 입은 사제들이 다가와 괜찮느냐고 물었다. 알렌의 것과 똑같은 디자인의 단복이었다. 이윽고 그들은 결계진 주위를 둥글게 에워쌌고 중얼중얼 동일한 기도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러자 와이번은 미친 듯이 몸을 비틀며 고통스러워했다.
뭐 이쪽까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어쨌거나 라비도 마족이었으므로 그 구마의식에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신이 짓이겨지는 압박감에 땅을 짚고 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는데, 문득 누군가 그 앞을 막아섰다. 라비는 눈을 찡그리고 자꾸만 흐려지려는 초점을 바로잡았다. 그러면 윤곽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 어딘가 낯익은 뒷모습—
“…과연 라비는 아니었군요.”
그를 보자 정신없는 와중에도 울컥했다. 알렌은 검집에서 화려하게 보석이 박힌 장검을 꺼내들었다. 척 봐도 영험해 보이는 그 물건은 난폭할 정도로 성스러운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웬만한 중급 마물들은 맥도 못 추고 한 번의 휘두름에 절명할 검기였다. 그러니까, 내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거의 죽어가는 목소리에 알렌이 뭐라 답해준 것 같았는데, 그대로 까무룩 의식을 잃어버려서 미처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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