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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라비] 달콤하지 않아 “추워…….”​​이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한기에 몸을 바르르 떨며 가슴팍으로 두 손을 웅크려 붙이다가 불현듯 잠이 깬 것은 깊은 새벽이었다. 라비는 이불을 둘둘 만 채로 팔만 쏙 내밀어 머리맡에 있을 핸드폰을 더듬더듬 찾았다. 어둠에 익숙해져있던 그의 눈이 시리도록 환한 액정화면을 인식하기까지는 대략 5초 정도 소요되었다. 3시 5분. 아직 알람이 울리려면 한참 남았다. 더 잘 수 있을 거라 안도하며 비몽사몽 돌아눕는데, 옆에서 자고 있는 알렌의 기색이 어쩐지 이상했다. 뭔가 지독한 것에 시달리는 듯 미간이 괴롭게 일그러져 있었고 주먹을 꽉 쥔 손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던 것이다. 당황한 라비가 급히 흔들어 깨우자 그는 잠시 뒤척이더니 이내 두 눈을 느리게 꿈뻑꿈뻑거리며 떴다. 그리곤 가만히 눈동자를 굴려..
[알렌라비] 은총이여 오라 1. 떠돌이 마법사와의 조우 ​ 알렌이 라비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와 만난 것은 지독한 우연 혹은 싱거운 운명 쯤 될 것이다. 그가 아직 제네바 슈비츠의 팔라딘이었던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운 교리에 의하면 모든 것은 순리에 의해 돌아가며 그게 바로 신의 뜻이자 유일선이라 하였으나 기실 라비와의 인연을 그렇게 장황하게까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썩 유쾌하지 못한 사건으로 얽혔고 어쩌다보니 동행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 전말을 설명하려거든 알렌이 교회에서 보낸 추격자들에게 쫓기다가 갓 크로노베리에 도착했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달은 전투 끝에 오랫동안 함께 해온 애검마저 부러지고 간신히 목숨만을 부지하여 마을 어귀 곳간에 숨어들었던 그때. 화살에 스친 허리춤은 피범벅이었으며 낭떠러지에서 떨..
[알렌라비] 공생 2 떳떳하지 못한 일을 업으로 삼으면서 라비에겐 혼자 결심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스스로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믿지 않을 것. 이유는 간단했다. 단순히 적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가 기밀 데이터를 팔아치운 바람에 전순 나락으로 떨어진 기업의 수를 헤아려보자면 감히 천문학적 수준에 달할 것이니. 물론 라비는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 정도는 가지고 있었으나, 세상에 미안하다고 다 해결되는 일만 있지 않은 게 문제였다. 아마 지금쯤 복수를 위해 혈안이 되어 그를찾고 있을 터다. 언제 어디서든 그렇게 개죽음 당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살다보니 라비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감추고 회피하는 데 능숙해졌다. 그런 면에서 그림자 구역은 몸을 숨기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그곳에는 사회에서 격리되거나 기피 받는, 혹은 존재를 부정..
[알렌라비] 음험한 것을 논한다면 라비에게는 평소보다 한 시간 가량 이른 기상이었다. 이유는 딱히 없다. 그냥 밤잠을 설쳤다. 깨고 나니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 얕은 꿈이었는데 눈을 떴을 때 식은땀을 흠뻑 흘리고 있었던 걸 보면 대단한 악몽이기라도 했나보다. 간밤의 피로가 채 가시지 않아 잠이 덜 깬 손길로 비몽사몽 칫솔에 치약을 짜면서 그는 문득 요사이 꾼 꿈들이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꿈치고는 제법 과한 정신력 소모를 요한다는 점이다.​​해석학에서 꿈이란 뇌의 휴식이나 근육 이완이 이뤄지지 않은 렘수면 상태에서 전이되는 무의식의 표상으로 그 시점에 처한 환경적 요인과 정신적 스트레스 등을 매개하여 적당한 상징성을 가지고 2차 가공되는 것이라고 본다. 요컨대 꿈을 조심스레 해체해서 거슬러 올라가면 이드의 세계에..
[알렌라비] 턴어라운드 8 fin “자, 이제부터 수를 셀 거예요. 하나, 두울, 셋……” 아이들이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크리스마스 날 받고 싶은 선물에 관한 기도를 하는 동안 알렌은 창틀에 기대어 새로 들어온 동화책을 심심풀이 삼아 넘겨보고 있었다. 부엌에선 빵을 굽는 듯 달콤한 냄새가 풍겨왔고 거실 중앙 커다란 트리에는 곧 각자의 소원쪽지가 걸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고아원 측에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이라곤 후원 받은 스웨터나 목도리, 털모자 따위가 전부였으니까 결과적으론 아이들에게 실망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알렌은 왠지 아이들의 순수함을 기만하는 행동을 하는 것 같아 어제부로 내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렬로 늘어선 조그만 뒤통수들을 응시하는데 지도 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미소가 꽤나 호감상의 중년이었다. “워커 씨도 ..
[알렌라비] 찬란한 이름으로 눈을 뜨니 창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는 빗방울이 연신 창문을 후득후득 두드렸고 구름 낀 하늘은 회색으로 보였으며 평소보다 낮게 드리운 것 같았다. 낮인지 저녁인지도 분간되지 않았으나 어차피 최근의 알렌에게 이미 그러한 시간감각은 사라진지 오래다. 이윽고 상체를 일으키려다가 팔이 불편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알렌은 뒤늦게 팔뚝에 꽂힌 링거바늘을 보았다. 아. 이번에도 살아났구나. 무감각하게 어제 먹은 수면제의 개수를 헤아렸지만, 이제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라비는 발갛게 퉁퉁 부은 눈을 하고 방에 들어왔다. 몹시 파리해보였다. 그 때문인지 알렌이 일어난 것을 확인하고도 그저 슥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침대 맡 의자에 앉은 라비가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안 그래도 창백한 ..
[알렌라비] 턴어라운드 7 라비와 마주쳐야만 하는 날짜가 다가올수록 알렌은 멍하니 있는 횟수가 늘어가고 있었다. 그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몇 개월 전 라비와의 만남으로 지난 과거들을 모조리 다 청산했으며, 또한 더 이상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려 그와 저녁식사를 하고 침대를 내주거나 선뜻 피아노를 쳐줄 수 있을 리가 만무했으리라. 알렌은 요즘 스스로를 성찰하는 일에 굉장히 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감정이 결단코 미련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마침내 라비의 존재 자체가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삶의 방식부터 시작해서 관철하는 가치관이나 신념, 걸어온 길까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애초에 서로 백해무익할 뿐인 관계였던 거다. 그래, 처음부터 이걸 깨달..
[알렌라비] 턴어라운드 6 알렌 워커의 최근 석 달은 평범함이 지극히 간절했던 기간이었다. 평범함이래봤자 뭐 별 건 없다. 끼니를 제때에 챙겨먹고 다가올 계절을 준비할 코트를 새로 산다든가 길어진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다듬는 일. 딱히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그는 남들과 같은 삶을 원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여태까지 뒤쳐져온 만큼의 공백을 메꿀만한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레슨을 늘리고 고아원 봉사활동을 다니며 일부러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보란 듯이 잘 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 대상이 누구인지 알렌은 의식하지 못했다. 얼마 전에는 고약한 감기를 얻었다. 요사이 갑자기 몸을 혹사시킨 대가 같았다. 열이 펄펄 끓고 눈앞이 흐릿해서 침대 위에 누워 골골대는 것 말곤 달리 방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