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비가 맨 처음 알렌에게 가졌던 선입견에 견주어 볼 때 가장 의외인 점은 바로 그가 생각만큼 썩 순진하지는 않더라는 것이었다. 앳된 얼굴과 공손한 말씨, 어리숙할 정도로 무른 성격이라든지. 또 놀리면 즉각 반응하는 모습이 재밌었으니까 그게 못내 치기 어린 애송이로만 보였던 것 같다. 뭐, 어디까지나 첫인상에 대한 얘기다. 이후 함께 다니면서 깨달은 것인데 알렌은 확실히 다정했지만 아둔하게 굴지는 않았고 오히려 다소 음험했으며 나이에 비해 조숙했다. 물론, 여러 가지 방면에서.
라비가 가장 최근 그 사실을 재인식하게 된 건 두 사람이 임무를 함께했던 보름 전이었다. 그들이 파견된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은 투우와 플라멩코의 기원지였고 시기적절하게도 그때가 하필 축제기간이었던 것이다. 관광객 인파에 휩쓸려 길을 잃고 한참 전전하다가 해가 질 무렵 뒤늦게 숙소를 잡으려보니 이미 방이 다 꽉 차있었다. 결국 도시 변두리까지 나가야했으며 겨우 빈방 하나를 구했을 땐 어느 새 자정이 넘어 있었다. 두 사람이 묵기에는 터무니없이 작은 방이었으나 이마저도 감지덕지인지라,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는 그들에게 여관주인은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건네었다. 분홍색 코팅비닐로 포장된, 손바닥 반 마디 크기의 납작한 정사각체. 심드렁하게 받아들어 살펴보던 라비의 눈이 그 정체를 확인한 순간 휘둥그레 해졌다. 그러니까, 그것이 무엇이었냐면, 피임기구였다. 그것도 딸기향의.
라비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을 구르면서 웃었다. 하기야 집시 문화가 만연한 남부지역 정서상 그렇게 보였다고 해도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워낙 야심한 시간이었거니와 축제기간이다 보니 이런저런 목적으로 여관을 찾는 연인들이 많았겠지. 그래도 역시 이건 너무……. 하도 웃어서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자 알렌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라비는 설명 없이 손에 든 것을 팔랑팔랑 흔들어주었다.
「알렌, 이게 뭔지 알아?」
「콘돔이잖아요.」
「어라.」
「뭐, 주인 분께서 오해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알렌은 그걸 보고도 퍽이나 심상히 말했다. 그게 지나치게 멀쩡한 기색이라 도리어 더 당황했다. 알렌은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며 옛 추억을 회상하는 어투로 몇 마디 덧붙였다. 스승님이 매일 가지고 다니셨죠. 때때로 심부름시키거나. 정말로 수행을 한 건지 아니면 그저 손발 노릇을 한 건지 영 미심쩍긴 했지만, 어쨌거나 라비는 그 말에 간신히 수긍했다. 그 자와 수년을 동행했다면 그럴만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알렌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의외로 타산이 밝았고 도박에도 능통했더랬다. 화술이 좋아 낯선 자로부터 금방 호의를 끌어내며 특히 여성에게 신사다웠다. 마냥 애처럼 대하던 녀석이었는데, 가만 보니 곰인 척하는 여우가 따로 없어 새삼스레 기분이 묘해지는 거였다. 그래 그 위화감으로부터 뭔가, 심보가 짓궂어졌다. 알렌을 만난 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내심 그를 잘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계기였다. 알렌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자꾸 콕콕 찔러보고 싶어지는 때가 늘었다. 요컨대, 라비는 알렌에게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일방적인 괘씸함을 느꼈단 소리다.
“너, 첫 경험은 해봤어?”
자칫 무례할 수도 있는 질문이 나간 건 그러한 심리 때문이었다. 반은 술김이었고, 반은 술김을 빙자해 심술을 부리는 게 목적이었다.
교단의 망년회, 고양된 분위기에 젖어 다들 무리하게 술잔을 기울인 자리였다. 새벽 세시쯤 되자 대부분 테이블에 엎어지거나 곯아떨어졌고, 애주가기는 해도 대주가는 못 되는 라비 역시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잠깐 잠들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땐 방으로 향하는 복도였으며 알렌이 저를 부축해주고 있었다. 의식이 몽롱해지고 감각이 무뎌졌으므로 그때 라비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질질 끌려가면서 알렌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밖엔 없었다. 알렌은 그 말없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던지 많이 취한 모양이라며 어설프게 웃었다. 라비를 침대 위에 내던지다시피 눕혀놓고 후다닥 되돌아가려는 찰나, 라비가 그의 팔뚝을 덥썩 붙잡았다. 기습적으로 확 힘을 주어 제 위로 잡아당기자 알렌은 휘청하면서 양 옆에 얼결에 손을 집었다. 가까이 내려다보게 되는 민망한 자세가 당혹스러워 마지않는 기색이었다.
“갑자기 무슨…….”
“당연히 안 해봤겠지 싶었는데… 뭔가 수상해. 그치, 했지.”
“…일단 이것 좀 놓고 말해요.”
물론 라비는 알렌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토록 당황하는 표정을 보니 간만에 장난기가 스멀거렸다. 술 취한 그는 조금 더 대담해졌고, 비상식적인 행위에의 유도를 느꼈다. 그러니까 무릎을 세워 알렌의 두 다리 사이에 살짝 닿을 듯 말 듯 문지른 것은, 그 순간의 변덕이었다. 대번 경악으로 물드는 알렌의 얼굴을 향해 라비는 배시시 웃었다.
“잠깐, 지금, 뭐하는 거예요……!”
“에게? 반응은 아직 애잖아.”
팔을 빼내려고 당겨보았지만 워낙 힘이 안 들어가는 자세인지라 꿈쩍도 안했다. 라비의 움직임에는 성적인 느낌이란 일절 없었고 그저 얄밉게 놀리는 듯했는데, 그게 더욱 울컥했다. 진짜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 잔뜩 술에 취해서 평소보다 바보 같았다. 한편 계속해서 자극받고 있는 곳은 조금씩 예민해졌다. 점점 견디기 힘들어짐에 알렌이 작게 흠칫하자 라비는 그 얼굴을 조심스레 들여다보았다. 미간을 살풋 찡그리고 아랫입술을 깨무는 게 평소의 금욕적 이미지와는 멀어 보여서 가슴이 쿵쿵거렸다.
여기에서 장난이 끝난다면 차라리 후회할 일은 없었을 텐데, 공교롭게도 이대로 가만 당하고만 있기에는 알렌 또한 그리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었던 게 문제였다. 라비의 그러한 도발에 문득 불쑥하고 오기가 들었던 거다. 어쩌면 전혀 연상 같지도 않은 사내에게 애 취급을 당하는 억울함 때문일 수도. 어느 쪽이든 간에 알렌은 망설임 없이 붙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덥썩 라비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헉, 방심하고 있던 라비가 순간 놀란 숨을 삼켰다. 달라붙는 바지 위로 한 부위만 집중적으로 꾹꾹 누르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다리를 꼬면서 몸을 비틀었다. 그제야 라비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가셨다. 흐려진 눈을 찡그리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제정신으로 만취한 사람과 똑같이 군다는 게 조금 꺼림칙했지만 라비가 먼저 시작한 거예요, 하고 대충 합리화하기로 했다.
“헉, 아, 잠깐, 알렌…….”
“그러는 라비야말로 아직 애네요.”
“…잠, 아, 손 떼라고!”
라비는 허리를 들썩이며 가능한 손길을 피하려고 하다가 결국 알렌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알렌도 그쪽이나 먼저 놓으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밑에 있는 입장은 잡아당길 때는 편할지 몰라도 밀어낼 때 한 없이 불리했다. 한참 힘의 주도권을 찾기 위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건 어느 순간부터 단순한 힘겨루기가 되었다. 옆구리나 목덜미를 간지럽히고 정강이를 차면서 서로 먼저 무너지지 않으려고 옥신각신하는데 별안간 라비가 중심을 잡지 못해 비틀거렸다. 뒤로 넘어져 침대목에 뒤통수를 부딪힐 뻔한 찰나에 알렌이 화들짝 놀라며 가까스로 받아냈다.
이윽고 동작이 멎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적나라하게 교차되는 두 개의 가쁜 숨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그 순간, 알렌은 몸서리쳐지는 야릇한 기분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때 내려다본 라비의 얼굴은 진짜 제정신인 사람의 것이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뭔가, 단둘인 방안에서 이 상황은 조금…….
“―알렌 여기 있어?”
불쑥 방문이 열렸다. 방금까지 묘한 분위기에 휩싸여 멍하니 있던 라비는 식겁하며 무작정 알렌을 이불로 덮었다. 아마 망년회의 뒷정리를 마저 하던 모양인 리나리가 방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알렌이 라비를 데려다준다고 한 이후에 영 보이질 않아서 찾으러 왔다고 했다. 라비는 도리질 치며 자기는 못 봤다고 발뺌했다. 술이 덜 깨서인지 스스로도 느껴질 만큼 엉성한 연기였다. 침을 꿀꺽 삼키는데 다행히도 리나리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그러고 보니, 라비 혹시 어디 아파? 얼굴이 너무 빨간데.”
“어? 아니, 과음해서 그런가…….”
“그래도 푹 쉬어야겠다.”
그녀는 내일 아침 단원들의 숙취해소에는 토마토스프가 좋겠다면서 중얼거리곤 금방 떠났다. 그 인기척이 사라지자마자 이불을 헤치고 벌떡 일어난 알렌은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어쩐지 상기된 얼굴이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는데 잠깐 뻐끔거리더니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대체 부끄러운 건지 화가 난 건지 모르겠는 그를 쳐다보면서, 라비는 아무래도 놀려먹기엔 녀석이 너무 성가셔졌다고, 뭐 그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그의 다른 모습을 의식하기 시작한 부분에서부터 그랬다. 처음 만났을 땐 차라리 귀여웠지. 역시 모르는 게 더 좋을 때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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