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그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비교적 나아진 것은 없었다. 학교생활도, 주위의 시선도, 그리고 라비와의 관계도.
원래부터 빈말로라도 썩 친밀하다곤 말 못 할 두 사람이었다. 타인의 약점을 곧잘 간파하는 라비와 쉽게 도발에 넘어가는 알렌은 그다지 궁합이 좋지 않았던 탓이다. 요사이 그 아슬아슬함으로부터 무언가 터진 것 같았다. 하인들은 자세한 사정을 알지는 못했지만 적잖이 걱정스러웠다. 눈에 띄게 냉랭해진 분위기. 라비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는데 문제는 알렌이었다. 가급적 라비와 마주치는 것을 피했고 거북해했으며 조금이라도 화제를 꺼낼라치면 험악해졌다. 그 인간에 대해서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딱 잡아떼니 더 이상 추궁할 수도 없어서 하인들은 결국 조르르 라비에게 토로하기 시작했다. 입을 모아 먼저 사과하라며 독촉하거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캐물었다. 처음엔 라비 역시 발뺌했으나 그들은 라비의 회피하는 방식을 매우 잘 알고 있었으므로 집요했다. 그때쯤 되자 라비는 이 성가신 사태를 벗어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뭐, 물론 언제까지고 알렌의 냉전에 동참해줄 생각은 없었다. 마치 알아달라는 듯 못내 불쾌감을 피력하는 모습이 라비에겐 어린애의 토라짐으로밖엔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적당히 그 장단에 맞춰주고 있을 뿐이었다. 설사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경멸하고 있대도 그게 어림없는 치기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주제란 본래 그런 것이다.
12.
수업 참고도서를 빌리기 위해 저택 내 2층 서재에 들르려던 참이었다. 라비의 서재는 알렌이 여태까지 봐왔던 여느 도서관보다도 넓고 높았으며 한 치의 틈도 없이 책장에 빼곡히 꽂힌 책들은 언어도 부문도 각기 달랐다. 책이라곤 조금도 가까워 보이지 않는 그가 이토록 대단한 서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딱히 달갑지 않았으나, 그 고즈넉함이 맘에 들어 최근 자주 찾게 되는 장소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저녁식사를 마치고 서재로 향했는데 웬 인기척이 느껴졌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다가가보니 라비였다.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창가 소파에 앉아 살랑살랑 손을 흔드는 그를 보고 알렌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기실 정말 ‘우연히’인지도 불확실했다.
“공부 열심히 하는 모양이네.”
테이블에 각종 주류를 길게 늘여놓고 라비는 잘도 그런 말을 했다. 꽤나 진한 알코올 냄새가 나고 있는 것치고 그의 얼굴은 제법 멀끔했다. 알렌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이유를 단언할 수 없는 복합적인 불유쾌였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구는 뻔뻔한 태도가 단전을 더욱 들쑤셔댔다. 알렌은 잠깐 굳었다가 그냥 그를 무시한 채 발길을 뒤로 돌렸다.
“아직도 삐진 거야?”
“당신과 상종할 가치를 못 느끼는 거예요.”
“앉아봐.”
라비가 나지막이 불러세웠다. 서재는 워낙 조용해서 작게 말하는 목소리도 사뭇 울렸다. 그러니까 못 들은 척하고 당연히 걸어 나갔어야 했는데, 드물게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알렌은 순간적으로 갈등하고 말았던 것이다. 조건반사이자 무의식이었다. 발걸음이 멈칫함과 동시에 아차 싶었다. 태연히 대꾸하기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할 때 라비가 거듭 불렀다.
“앉아, 알렌.”
알렌에게 라비는 불편한 어른의 표본이었고 영 이길 수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라비는 알렌을 맞은편에 앉혀놓고 그 앞에 빈 유리잔을 건네었다. 그리고 말없이 술을 채웠다. 알렌이 황당한 표정으로 거절했으나 막무가내로 이참에 배우라고 했다. 그러더니 자신과 술내기를 하나 하자고. 너무나 일방적인 전개에 알렌은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 벅찼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 쳤다. 그걸 라비는 승낙의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간단해. 동틀 때까지 깨어있는 쪽이 이기는 거야.”
“성직자가 하는 놀이치곤 세속적이고 볼품없군요.”
“자고로 누룩 없는 빵과 포도주란 대대로 신의 피와 살이라고 하지.”
그런 얼토당토않은 변명에 흠잡기도 더는 진력났다. 유리잔에 표면이 넘실거릴 만큼 담긴 술은 무색무취했지만 아직 어린 알렌에겐 충분히 강렬한 존재감이었다. 조심스레 잔을 살짝 흔들어보는 알렌을 실실 웃으면서 바라보던 라비는 돌연 파격적인 제안을 한 가지 했다.
“네가 이기면 알려줄게. 워커 남작의 죽음에 관해서.”
순간 알렌의 안색이 싸하게 굳었다. 머리가 식고 손끝이 차졌다. 서느렇게 시선을 올리자 라비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입장임을 아니까 더욱 여유작작했다. 다만 이번에 알렌은 그 태도보다도 제시한 조건에 분노했다. 자신이 응당 알아야할 사실에 대해,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 구는 것이 참을 수 없이 불쾌했던 것이다. 알렌이 아랫입술을 잘근 짓이겨 물었다. 저러다간 피가 날 텐데. 그때 라비는 괘씸하게도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도대체…, 당신은, 어디까지……!”
“궁금하지 않아? 무엇이 마나 워커를 그렇게 죽음으로 몰았을까.”
“……특발성 폐질환이었어요. 워커 가의 유전병이라고…”
“너도 눈치 채고 있을 텐데. 그건 단순한 병이 아니었어.”
라비가 말을 가로챘다. 알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목 언저리를 달막거리는 울걱임에 겨워 숨을 크게 삼켰다. 진실 앞에 알렌은 언제나 나약했고 멀었다. 마나가 제 곁에 있을 때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알렌에게 세상의 일면만 보여주었으며 스스로도 비밀이 많은 사내였다. 사실상 알렌의 입장에서 라비와 마나는 비슷한 부류였다. 진실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웃는 낯으로 거짓말했다.
“약속, 꼭 지키세요.”
알렌은 술이 가득 담긴 잔을 90도로 꺾어 꿀꺽꿀꺽 단숨에 삼켰다. 쓰디 쓴 맛이 혀를 마비시키고 아찔한 기운이 전신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금방 얼굴에 열이 올랐지만 애써 정신을 붙들어 맸다. 고개를 살짝 털자 라비가 재미있다고 하하 웃었다. 안 마시고 뭐해요? 알렌이 오물거리는 발음으로 톡 쏘아붙였다. 그제야 그래그래, 하며 그도 똑같이 잔을 비워냈다. 시간은 이제 겨우 8시 남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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