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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턴어라운드

[알렌라비] 턴어라운드 4














그대는 고통으로부터 숭고해졌고 나는 그 숭고함을 꽃처럼 꺾고 싶었소. 라비가 쓰는 문장은 수사로 점철되어 있거나 너무 현학적이라서 종종 알렌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첫 베스트셀러였던 《OWEN》 역시 그러했다. 그래, 어떤 문화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트라우마 세대의 암울함과 비천함, 그리고 허무맹랑한 욕망의 가장 적나라하고 아름다운 향유이자 권태였다. 그 말조차도 무슨 뜻인지 긴가민가했지만 어쨌거나 그것만이 라비의 글을 설명했다. 



라비를 처음 만났던 날 알렌은 밤새워 《OWEN》을 읽었으며 일말의 오기로 이후 세 번이나 복독했으나 결국 그 구절이 세간에서 찬사를 받으면서까지 함의하는 바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물론 워낙 문학에는 무관한 체질인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저 일회독 하는 것만으론 이해할 수 없도록 하여 여러 번 읽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대단히 성공한 책이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던 그때에는, 라비와의 만남이 거기서 끝일 줄 알았다.




“여기 보드카마티니랑 연어 카나페, 커티지파이 주문이요.”




라비가 향한 곳은 근방의 조용한 펍이었다. 일평생을 런던에서 살았건만 알렌에게는 이름도 낯선 곳이었다. 애초에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으므로 이런 자리가 익숙할 리가 없다. 그건 엉거주춤한 걸음걸이에서조차 티가 났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조명이 어둡고 흐려서 라비의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 그리 큰 배짱을 요하지 않았다는 부분이다. 이내 작은 2인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두 사람은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하기야 말이 많으면 그것대로 이상스러웠을 것이다. 알렌은 라비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썩 심드렁해 보이는 표정에서 딱히 긴말을 할 의향이 없다는 것쯤은 눈치 챌 수 있었다. 



아직도 커티지파이 좋아해? 마침내 첫 말이었다. 그러나 침묵을 깨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팽팽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는 왜 자꾸 3년도 훨씬 전의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알렌은 그가 옛날의 자신을 안다고 해서 그 사실이 지금까지 유효하게 작용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으며 동시에 실제로도 철저히 분리시키고 싶었다. 욱신거리기 시작한 속이 지리멸렬하게 어질러지고 있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은 알렌을 시험하고 있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그는 가시 세워진 혀로 아랫입술을 초조한 듯이 살짝 훑었다.




“―별로.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요.” 




못내 언짢은 대답에 라비는 그저 흐응, 하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일 뿐이었다.



이른 저녁이라 손님이 없어서 그런지 주문한 메뉴들은 제법 일찍 나왔다. 라비가 술잔을 들어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끝 맛이 독한지 인상을 찡그린다. 안주를 쏙 입에 집어넣자 한쪽 볼이 햄스터처럼 튀어나왔다. 그 태평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맥이 탁 풀렸다. 




“차 가져왔는데 괜찮겠어요?”


“괜찮아. 넌 술 안 마시잖아.”




라비는 당연하다는 듯 그런 말을 했다. 그제야 알렌은 그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고작, 운전기사가 필요했다 이거다. 면허가 있고 런던에 거주하며 술을 마시지 않아 자신이 취하더라도 후에 수습을 해줄 수 있는 인물. 라비에게 그 조건에 딱 들어맞는 것이 헤어진 지 3년 된 옛 연인이었다는 점이 실로 어처구니없었다. 뭐, 그는 그다지 신경 쓰고 있지 않을 테지만. 



안주는 금방 바닥을 보였다. 라비가 부담 갖지 말고 시키라며 부추기는 바람에 결국 훈제 닭가슴살 요리를 포함하여 서넛 그릇정도 더 주문한 것 같다. 술기운이 돌기 시작하자 라비는 평소보다 약간 말이 많아져서 그간 어떻게 지냈냐는 통상적인 안부 인사를 건네어왔다. 지금 와서야 그런 걸 물어보는 것도 웃겼다. 그렇지만 알렌은 이제 굳이 대답을 회피하지는 않았다. 아예 진로를 그쪽으로 돌린 거야? 아뇨, 영화음악 외주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예요. 아직 어리니까 콩쿠르에 나가보는 것도 커리어에 나쁘지 않을걸. 그런 욕심은 없어요. 마치 가벼운 주정과 같은 사소한 말거리들에 꼬박꼬박 답해주고 있는데 문득 그의 페이스에 휘말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차 싶었다.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아니면 그 밖의 자존심 문제인지 구분 짓는 건 무의미했으나 그 순간 분명 어떤 오기가 들었던 것 같다. 더 이상은 절대 이런 패턴에 넘어가지 않으리라고. 지금 레슨하고 있다는 여자는 예쁘게 생겼냐는 정말 시답잖은 질문에 알렌은 눈을 접어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리곤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로망 씨랑은 왜 헤어진 거예요?”




아주 찰나, 라비의 표정이 부루퉁해졌다. 그러나 금방 보통 때로 돌아와서 알렌은 눈치 채지 못했다. 라비는 딴청 부리듯 포크로 양상추의 아삭한 부분을 쿡쿡 찌르면서 턱을 괴었다. 그러고 나서 검지로 자기 뺨을 톡톡 건들다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왜긴.”


“…….”


“이유가 있겠어. 그냥 때가 됐으니까 헤어진 거겠지.”




아. 정말 그다운 대답이다. 무심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알렌이 기가 차서 피식 웃었다. 스스로를 향한 비소였다. 그럴듯하거나 진지한 이유 따위 들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갑자기 왜 그게 궁금했는지 모르겠다. 허탈함을 단념하고 알렌은 서비스로 나온 매쉬드 포테이토를 떠서 입에 넣었다. 라비는 잠깐 그 모습을 지켜보다 술 한 잔을 더 주문했다.



그때 알렌은 도리어 로망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도 라비처럼 추호의 아쉬움이나 미련일랑 보이지 않고 있을까? 프랑스인들은 대개 자유분방하고 변덕스럽다는 세간의 편견에 따르면 일리 없는 추측은 아니다. 하지만 로망은 몹시 감성적인 한편 이상주의적인 면이 있었다. 그런 부류는 종종 자신의 취약한 점을 드러내어 쉽게 상처 입곤 한다. 예컨대, 과거의 알렌처럼 말이다.



옛 일을 떠올리는 것은 언제나 그를 피로하게 만들었지만 의도치 않더라도 원초아가 제멋대로 과거를 거슬러 빗장 걸어놓은 기억의 단편들을 끄집어낼 때가 있다. 보통 잊어버리고 싶어 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부조되어 매 순간 트리거를 더욱 자극하는 종류의 기억이다. 로망을 향한 연민 후에, 알렌은 첫 만남부터 이별까지 하고 싶은 대로 실컷 저지르고 홀연히 유학을 떠났던 라비를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제 전부가 그에게 휩쓸리기만 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위로를 가장한 일체의 호기심. 널 조금 더 이해하고 싶다는 노골적인 고백을 어째서 제대로 거절하지 못했더라.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에 알렌은 잠깐 고민에 잠겼다가 그 시절의 자신이 그런 미시적인 요소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정도로 간절했거나 멍청했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추측했다. 당시, 그러니까 마나가 떠난 직후 그는 천천히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었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혼돈이었으며 도사리고 있는 죽음이었다. 숨을 앗아가는 악몽에 잠 못 이루던 수많은 밤과 정신적 혹은 육체적인 공백들……. 산 채로 온통 썩어 들어가는 듯 했던 그때 남겨진 것들 사이에서 주저앉아 생각했던 것이다. 이 보잘 것 없는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야만 한다고. 



결국 3시간동안 라비는 혼자서 독한 칵테일 다섯 잔을 비웠다. 본래 애주가는 되어도 대주가는 못 되는 터라 종내 썩 멀쩡해보이진 않았다. 팔을 테이블에 받치고도 고개를 제대로 가누질 못해서 자꾸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잔 더 주문하려는 그를 제지하는 게 알렌의 역할이었다. 손목을 붙잡자 라비는 순순히 팔을 내렸으나 반쯤 풀린 눈으로 무언가를 요구하듯 빤히 쳐다봐오기 시작했다. 그가 이토록 취한 건 처음 보았는데, 그래서인지 이렇게 시선을 마주하고 있어도 그리 버겁지 않았다. 어쩌면 멀쩡한 척해도 취하고 싶을 만큼 힘들어하고 있는 걸까. 그렇지만 진심으로 실연하는 라비라니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알렌은 계산을 마치고 나와서 여전히 휘청거리는 그의 옆구리를 감싸 안았다. 취기 어린 숨이 일정한 간격으로 귓가에 닿았다 흩어졌다. 그는 온전히 알렌에게 의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또한 잠깐 수다스러워지는 듯싶더니 한계점에 다다르자 오히려 무척이나 차분했으며 말이 없었다. 평소보다 달아오른 양 볼과 흐린 눈빛만이 그가 취해있음을 증명했다. 그러다 알렌이 안전벨트를 매어줄 때는 무엇이 웃긴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한참 어깨를 떨던 라비는 이내 힘없이 몸을 늘어뜨렸다. 그리고 시트에 노곤하게 기대며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뜻 모를 말을 웅얼거렸다.




“……난 네가 친절한 건지 마음이 약한 건지 모르겠어.”




차창 밖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네온사인 빛이 그들의 얼굴위로 난반사되고 있었다. 라비의 말에 알렌은 잠깐 사색에 잠겼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느 쪽도 아닌 것 같아요. 그 대답이 라비에게 유의미하게 들렸을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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