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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턴어라운드

[알렌라비] 턴어라운드 6













알렌 워커의 최근 석 달은 평범함이 지극히 간절했던 기간이었다. 평범함이래봤자 뭐 별 건 없다. 끼니를 제때에 챙겨먹고 다가올 계절을 준비할 코트를 새로 산다든가 길어진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다듬는 일. 딱히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그는 남들과 같은 삶을 원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여태까지 뒤쳐져온 만큼의 공백을 메꿀만한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레슨을 늘리고 고아원 봉사활동을 다니며 일부러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보란 듯이 잘 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 대상이 누구인지 알렌은 의식하지 못했다.



얼마 전에는 고약한 감기를 얻었다. 요사이 갑자기 몸을 혹사시킨 대가 같았다. 열이 펄펄 끓고 눈앞이 흐릿해서 침대 위에 누워 골골대는 것 말곤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심하게 앓은 것은 처음 마나의 집에 들어오던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때 마나는 식은땀이 맺힌 이마를 적당한 온도의 수건으로 닦아주고 데운 우유와 따뜻한 수프를 머리맡에 가져다주었는데—. 환영에 시달리다가 기절하듯 잠에 빠진 후 눈을 뜨니 두 볼이 축축이 젖어있었다. 세수를 하기 위해 화장실에 간 알렌은 거울을 보고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퉁퉁 부어오른 눈, 아직 발그스레한 낯, 동작은 전체적으로 흐트러졌고 입술은 메말라 있었다. 그리고 나약한 자신과 그런 스스로를 향한 환멸이 담긴 익숙한 눈빛……. 죽음과 가까운 그 모든 것들이 다시 그에게 돌아와 있었다. 



그간의 노력이 말짱 헛수고가 된 기분이었으므로 약간 서글퍼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렌은 예전처럼 마냥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그 순간 제 비참함에서 기인한 오기가 마치 역점처럼 반구를 자극해왔던 것이다.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감정이 폐부 위로 왈칵 쏟아져 내렸고, 그는 이것이 삶을 향한 갈망임을 끝내 인정했다. 찬물로 열 오른 얼굴을 헹궈내며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러고 나서 리나리가 준 레시피대로 오트밀 포리지를 직접 조리해 먹었다. 한참 굶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제 요리 실력이 향상된 것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맛있었다. 




‘워커 선생님. 날씨가 많이 추워졌어요. 감기 드신 건 괜찮으신가요?’




알렌에게 가장 오래 레슨을 받은 학생인 캐럴이 건넨 편지의 첫머리는 그렇게 시작했다. 며칠간 말없이 레슨을 빠진 것이 걱정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제 완연한 가을이라며, 그렇지만 애초에 여름과 겨울을 잇는 계절이니 가을만큼 불완전한 것은 또 없겠죠, 하고 약간 횡설수설하게 문장을 이었다. 어설프고 풋내 나는, 그러면서도 온전히 깨끗하게 보전된 진심이 담긴 고백이었다. 그 무게감이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캐럴은 유복한 가정에서 듬뿍 사랑 받으며 자랐고, 따라서 사랑을 표현하거나 주는 것 역시 노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렌에게는 그러한 완벽한 사랑스러움이 미안할 정도로 과분했을 뿐더러 그녀는 고작해야 열아홉이었으며 그저 어린 아이로밖에 느껴지지 못했다. 결국 정중히 거절했다. 캐럴은 울먹이지도 않았다. 잠깐 시무룩해하다가 금방 평소처럼 활짝 웃었다. 그래도 선생님 많이 변하셨어요. 처음 봤을 때보다 좋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그리고 그 말을 알렌은 제법 오랫동안 곱씹었다. 정말로 나는 변했을까. 그토록 과거의 초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왔으면서 정작 기분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이대로 마나의 죽음을 극복해버린다면, 그건 그를 영원히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겨울에 조금 더 가까운 가을, 리나리의 졸업연주회가 다가왔다. 리나리가 택한 곡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바이올린 그리고 첼로를 위한 트리오였다. 두 귀 똑똑히 열고 잘 들어두라던 그녀의 말을 떠올리건대 아마 6년 전 콩쿠르에서의 설욕을 하지 못한 것이 아직도 맘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선전포고한대로 경쾌한 건반에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찰현악의 선율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연주가 끝나자 모든 관중이 기립박수를 쳤다. 알렌 또한 무대 위를 향해 감탄과 존경을 보냈다. 꾸벅 허리 숙여 인사하는 리나리의 얼굴은 무척이나 개운했고, 동시에 서운해보였다. 




“졸업 축하해요, 리나리.”




연분홍색의 레가토로즈 꽃다발을 건네자 리나리는 한층 환해진 얼굴로 받아들었다. 감사인사를 전하려는 순간 카메라 플래쉬가 터지며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아무래도 졸업생들끼리 연주회 뒤풀이를 하러가는 모양이었다. 알렌은 홀을 빠져나가는 그들의 움직임을 잠시 살피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 사람들 안 따라가도 돼요?” 


“나중에 합류하면 되니까 괜찮아.”




리나리는 그의 그런 성마른 배려를 잘 알고 있다는 듯 웃었다. 어차피 옷도 갈아입을 겸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대기실로 이동하는 내내 그녀는 무수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축하를 해주거나 받았다.




“멋진 연주였어요.”


“내가 뭐랬어. 긴장하랬잖아.”


“졸업연주회라기엔 상당히 이를 간 느낌이던데요.”


“뭐, 그런 감상도 나쁘지 않네.”




리나리는 꽉 묶은 머리를 시원스레 풀어 내렸다. 화장대 앞에 앉은 그녀의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을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알렌은 문득 처음 그녀와 만난 날을 떠올린다. 그녀도 같은 회상에 잠긴 듯 보였다. 그 날의 두 사람 역시 지금처럼 같은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대신 지금보다는 더 서로를 경계하며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사로잡힌 채로.




“알렌 군한테는 꼭 보여주고 싶었거든, 내 연주.”




6년 전이 마지막이었잖아. 기억하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네가 우승하고 나는 준우승을 했었지. 그때 엄청 울었던 기억이 나. 피아노를 시작한지 3년밖에 되지 않은 풋내기한테 졌다는 게 당시엔 되게 서러웠어. 그래도, 그 경험 덕분에 내가 피아노를 정말 좋아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으니, 결과적으론 네 도움을 받은 셈이야.




“그러니까, 알렌. 나는 너에게 고맙게 생각해.”




말을 마친 후 거울에 비친 리나리의 올곧은 눈빛이 알렌을 향했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고서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어쩐지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타인을 평온하게 만드는 데에 탁월한 소질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알렌은 자신이 그러한 감사인사를 들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절할 수도 없어 섣불리 대답치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러자 리나리는 조금 텀을 둔 다음 말을 이었다. 




“나는 다시 너와 겨뤄보고 싶어. 두 번 다시 지는 일은 없을 테니 각오해두는 게 좋아. 이번에는 주니어 대회가 아닌 공식 무대에서.“


“…….”


“기대해도 되는 거지?”




그것은 엄청난 위로였고 격려였으며 동시에 강렬한 신뢰처럼 느껴졌다. 알렌은 그렇게 찬란한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리나리에게 몹시 탄복했다. 감히 그런 그녀와 같은 ‘피아니스트’로서 함께할 수 있다면 분명 크나큰 영예가 될 것이다. 벅차오르는 마음에 절로 눈시울이 붉어져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쿡쿡 웃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벌써 눈치 챈 모양이었다. 슥슥 대충 눈가를 셔츠 소매로 문질렀다.




“……영광이에요. 리나리.”







*   *   *







언젠가 한여름 밤의 꿈같았던 짧은 프랑스 여행에 대한 추억이 차츰 흐릿해지기 시작할 때 쯤 알렌에게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이전에 좋지 못한 기억이 떠올라서 잠깐 망설이다가 끊기기 직전에야 받았다. 수화기너머로 ‘오랜만입니다.’하고 잊고 살았던, 그러나 확실히 낯익은 목소리가 전해졌다. 로망 위페르였다. 로망은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먼저 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서로 몇 마디의 통상적인 안부 인사를 주고받았다. 




[다름이 아니라 다음 달 둘째 주 금요일에 시사회가 있거든요. 참석해줬으면 하는데 시간 괜찮죠?]




시사회라니, 새삼 다른 세계의 얘기처럼 느껴진다. 알렌은 다소 떨떠름한 기분으로 어깨와 귀 사이에 핸드폰을 끼고 달력을 들춰보았다. 딱히 별 다른 일정은 없는 것 같았다.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괜찮아요.” 


[좋습니다~ 라비도 올 테니까 친한 사람 없다고 너무 겁내지 않아도 돼요.]


“…………예?”




순간,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거였기를 절실히 바라며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그러나 로망은 오히려 의아한 기색으로 라비가 오는 게 싫은 거냐며 반문했다. 아니, 알렌은 이제 상관이 없었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뻔뻔한 건지 둔한 건지 영 모르겠다. 다만 상관이 있는 쪽은……. 




“저, 그게 아니라…… 로망 씨는……”


[아하. 그거?]




별안간 웃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알렌은 제법 심각한 얼굴로 굳어 있었다. 혹시나 자신이 실수를 한 것일까. 두 사람의 관계에 더는 무례를 범하지도, 엮이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찰나동안 후회막심하여 바싹 애가 탔다. 다행히 로망은 지나친 참견처럼 느끼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지금 걱정해준 거 맞죠? 웃음기를 진정시키고는 능글맞게 그런다. 




[별 거 아니에요. 라비랑 나는.]




별 거 아닌 목소리치곤 상당히 회한에 빠진 듯한데. 여러 가지 질문들이 뇌리에 떠올랐지만 알렌은 어떤 것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거짓에 빠지기 쉽거든요. 그래서 끊임없이 갈구와 허무를 반복하면서 진짜를 찾아나서는 거예요……. 하지만 결국 그 끝에는 외로움밖에 없었죠. 그래서 잠깐 손잡았어요. 이대로 흘려버리기엔 젊음이 아까웠으니까. 그냥 그 뿐이에요.]




그 순간에는 라비의 소설을 처음 읽었던 때와 비슷한 감상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들로 점철되어 있었으나 분명 확고한 지향점이 존재했던 것이다. 마치 부옇게 흐려진 안개 사이에서 이리저리 손을 뻗어 나아가듯 혼란스러웠고 수많은 의문이 교호했다. 그대는 고통으로부터 숭고해졌고 나는 그 숭고함을 꽃처럼 꺾고 싶었소. 아직도 와 닿지 않는 그 문장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 암울함과…… 허무맹랑한 욕망의…… 적나라하고…… 권태…… 동시에 어순이 뒤바뀐 비문들이 머릿속에 한가득 떠올라 눈앞이 아찔했다. 이마를 짚었다. 회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녀석이 조금 더 솔직해졌으면 좋겠어요. 스스로에게든, 남에게든.]




알렌은 그날 뜬눈으로 밤을 샜다. 실질적으로는 라비와 자신이 더 오래 알고 지냈는데, 정작 그를 더 깊이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 어쩐지 묘한 감회를 자아냈다. 패배감 같기도 하고 자괴감 같기도 한,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지 없는 분함이었다. 그렇다면 그 시절의 라비에게 자신은 진정 거짓이었던 걸까? 머리로는 이미 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의외로 마음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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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까지 두 편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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