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의 정신적 피로가 누적되어서인지 머리는 수면부족으로 지끈거리고 있었으나 6시가 되자 습관처럼 눈이 떠졌다. 알렌은 성인 남성이 눕기엔 비좁은 소파 위에서 뻐근한 아침을 맞이했다. 어둠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고 새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오늘 같은 날은 조금 더 자도 되지 않을까. 그냥은 일어나고 싶지 않아 늦장을 부리다가 문득 ‘오늘 같은 날이 뭔데?’하고 자문해보았다. 그건 오히려 스스로를 나약하게 만드는 말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의 자기연민에 빠지기는 싫었으므로 결국 끄응, 자리에서 일어난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어쨌든 부지런히 커튼을 걷고 어질러진 거실을 치웠다. 방문을 열면 라비가 지난 새벽 침대 위에 눕혀놓은 모양대로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숙취가 심한 듯 종종 뒤척이며 잠꼬대로 앓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알렌은 언제나와 다를 바 없는 풍경 속 낯선 그의 존재에서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어쩐지 정반대의 감정 또한 경험하고 있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식어버린 죽 같은 그리움과 뜨거운 냉담 그 사이의 어딘가다. 하기야 이 집에 누군가 방문한 것이 3년 만에 처음이었으니 그로서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작게 한숨을 내뱉고 라비가 깨지 않게 다시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대강 청소를 마친 후 샤워까지 하고 나왔다.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며 시계를 보니 어느 덧 8시였다. 슬슬 아침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냉장고를 뒤적인다. 요리를 자주 하지 않다보니 재료가 턱없이 모자랐으나 사흘 전 샐러드를 해먹고 남은 감자와 토마토가 있어서 스튜를 만들기로 했다. 알렌은 도마를 꺼내어 감자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뒤 토마토를 가볍게 데쳤다. 올리브유를 둘러 달군 프라이팬에 남은 야채들을 한꺼번에 볶으면 금방 고소한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라비는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멍청스레 취한 것처럼 비척거리며 걸어와서는 알렌의 뒷모습을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식탁자리에 의자를 빼어 앉았다. 그의 눈은 반쯤 감겨있었고 잠결에 뻗친 머리카락이 잔뜩 부스스했으며 안색은 창백했다. 아침 인사를 할 기력조차 없는지 평소처럼 살갑지도 않았다. 알렌이 찬물을 따라 말없이 앞에 가져다주자 벌컥벌컥 들이마시더니 이내 그대로 철푸덕 엎드렸다. 그렇게 또 10분을 죽은 듯 잤다.
마음이란 것이 참으로 간사하다.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에게만 공명을 하기 때문이다. 그때 라비는 누가 보아도 망가지고 흐트러져있었는데, 그게 왠지 모르게 알렌의 기분을 누그러뜨렸다. 어쩌면 주제에 같잖은 동정심이라도 들었을지 모를 일이다. 알렌은 스튜를 접시에 덜고 그 위에 페퍼론치노를 올려 마무리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비주얼이었다. 식사하세요. 크지 않게 라비를 깨웠다. 힘없이 고개를 든 그가 비몽사몽하여 부루퉁한 얼굴로 접시를 건네받았다. 알렌도 맞은편에 앉았다. 이윽고 조용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맛있다.”
“다행이네요.”
“피아노만 잘 치는 줄 알았더니 요리도 잘하는 줄은 몰랐네.”
그 능청스러운 말이 우스워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재회한 이후 처음으로 웃어 보이는 거였다. 라비 역시 그것을 눈치 챈 모양인지 흘끔흘끔 알렌을 의식하는 것 같았다. 뻔뻔스럽기론 내로라하는 그가 남을 의식하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적어도 알렌이 느끼기엔 그랬다.
“방에 있는 서랍장, 아직도 안 고쳤더라고. 그거 내가 여기서 살기 한참 전부터 고장 나있었잖아. 잘 열리다가도 어쩔 때는 절반까지밖에 안 열려서, 언제는 네가 손이 베였는데 밴드랑 연고를 꺼내려고 급하게 서랍을 열다가…….”
그리고 또한 의외로 추억에 호소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술이 덜 깨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게 그의 본래 모습인지는 모르겠다. 그때 일 기억나? 알렌이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그러니까 라비는 마치 알렌의 기억을 어떻게든 들쑤셔놓겠다는 듯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가구를 옮기다 생긴 장판의 패인 자국이라든지 꽃이 안 핀지 오래된 목마가렛 화분, 그리고 3년 전과 똑같은 순서로 꽂혀있다는 서적들……. 뭐 대수롭지 않은 말거리들이다. 그래도 알렌은 라비가 하는 옛날이야기를 이번만큼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알렌은 어느 새 불쾌함이나 떨떠름함 대신 기묘한 의구심을 느끼고 있었다. 여전히 라비는 그에게 악독한 흉이었고 추억 운운하며 꺼내 보일만큼 애틋한 시절조차 되지 못했지만 동시에 무언가 오기를 솟아나게 하는 수수께끼 같았다. 라비는 끝내 할 말이 떨어진 것인지 한참동안 침묵했다. 늦은 아침의 온후한 공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그것은 짐짓 깨트리고 싶지 않은 평화처럼 보였다. 알렌은 지금 만약 자신이 어떤 말이라도 한다면 이 순간을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걸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다. 마치 신경전 같은 적막 후에 라비가 못내 다시 입술을 떼었다. 그는 오랜만에 피아노 연주가 듣고 싶다고 했다. 이번에도 알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회피가 아닌 긍정이었다.
* * *
한때 즐겨 치던 곡이 있다. 알렌에게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라는 별명과 함께 콩쿠르 우승을 선사해준 곡이다. 제8번 A단조 소나타. 파리에서 작곡되었지만 정작 당시 모차르트는 파리를 혐오하고 있었다. 그곳의 일시적이며 변덕스러운 대중들과 예술을 한낱 사치거리로밖에 여기지 않는 귀족들에게 분노하면서도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탓이다. 그뿐만 아니라 파리에 있던 시절의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가족 내 불화, 피아니스트로서의 침체 등 온갖 불운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비참함의 현지에서 기어코 자신의 숙명을 완성시킨 것이다. 이 사연으로 알렌은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가 그토록 괴로워하면서도 작품활동을 그만두지 않은 이유는 제 처지가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그게 자신의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낭떠러지 끝에 내몰리면 균형을 잡기 위해 무의지적으로 뻗어진 두 팔이 휘우청거리듯, 인생에는 살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살게 되는 순간이 있다.
여객기 사고, 그러니까 오래된 엔진의 결함이라고 했다. 기어박스가 잘못 맞물려서, 그게 폭발한 거였다고. 기실 원인이나 경위를 설명해줘도 단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불과했다. 그래서인지 눈물조차 쉬이 나지 않았다. 그때 할 수 없었던 것은 울음만이 아니었다. A단조 소나타를 연주하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였다. 건반에 손끝을 조심스레 대고 익숙한 음계를 누르면 떠오르는 과거의 잔상들에 침잠해버릴 것 같았다. 그러다보면 계속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위도 더위도 느끼지 못하도록 감각은 마비되었고 아무 일에도 흥이 나지 않았다. 이제 다신 피아노를 아예 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절망하던 적도 있다. 물론 괜한 걱정이었다. 그 고통들을 차라리 집어삼켜버릴 만큼 피아노는 이미 그의 삶의 전부였으므로.
순전히 남에게 들려주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은 것이 얼마나 오래 전 일이었는지 잠시 딴생각을 했다. 적게 잡아도 3년이 넘었다. 새삼 시간의 흐름에 놀라움을 느낀다. 모든 것들이 무수히 변해가고 있었다. 오직 알렌만이 스무 살이 되던 해 햇빛이 찬연했던 그 여름날 아직 거기에 홀로 멈춰서 있는 것 같다. 그곳이 언제든 추억을 되새기다가 헤어나올 수 있는 얕은 웅덩이였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 주변 사람들을 끌어당겨 물귀신처럼 다 같이 나락으로 빠져들게 하는 이를테면 늪이었다. 그러니까 다들 지쳐 떠났던 거고, 이별을 통보할 무렵의 라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연주는 어느 새 절정 부분에 다다르게 된다. 경쾌한 파토스가 빽빽해진 음표 사이에 휘몰아치며 손가락이 바빠졌다. 그때 문득 흘겨본 라비는,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무언가에 깊이 빠져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곡은 제목이 뭐야?”
“……리베스트라움입니다.”
알렌은 지금 제 마음을 스스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니, 생각을 전환하거나 그만두는 것조차 멋대로 할 수 없었다. 그저 피아노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앉은 라비를 쳐다보는 것만이 현재 그의 의지였다. 라비는 보기 드문 정안을 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 표정이 좋았다. 이 순간마저 평소처럼 실실 웃고 있었다면 알렌은 라비에게 원망을 넘어선 증오를 갖게 됐을 터다.
“그래도 난 예전에 들었던 곡이 더 좋았어.”
라비는 이제 당분간 못 볼 거라는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또 다시 홀로 남겨진 방에서 알렌은 한동안 느낄 수 없었던 이유를 모를 탈진감에 피아노 위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시끄러운 울림이 아주 찰나 크게 퍼졌다가 서서히 작은 파동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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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비통한 일을 치른 기억은 죽는 날까지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아버지도 제가 누군가의 죽음을 한 번도 목격한 적이 없다는 걸 아실 거예요. 처음으로 맞닥뜨린 죽음이 바로 어머니의 죽음이라니,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요. 그 순간에는 어머니의 뒤를 따르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가끔 계속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추위도 더위도 느끼지 못할 만큼 감각은 마비되었고 아무 일에도 흥이 나지 않습니다.”
A단조 소나타를 작곡할 당시, 스물두 살의 모차르트가 파리에서 잘츠부르크로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본문에 인용함.
삽입곡은 리스트의 사랑의 꿈(Liebestraum) 제 1장 고귀한 사랑(Hohe Lie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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