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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턴어라운드

[알렌라비] 턴어라운드 2














운명적으로 만나 첫눈에 반해 사귀었고 누구나 부러워할 법한 멋진 연애를 했으며 권태기가 찾아왔을 땐 쿨하게 서로를 놓아주었다.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헤어진 연인 사이. 그래, 맞는 말이다. 그러나 라비와의 관계를 단순히 그렇게 일단락하기에는 조금 더 복잡하고 예민한 사정이 연루되어 있었다. 적어도 알렌에겐 그랬다. 라비의 첫 베스트셀러와 알렌이 즐겨 연주하던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제8번, 오후 두시 경의 베르가모트 향기, 그리고 마나의 죽음. 그 모든 것들이 라비를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알렌을 괴롭게 했다. 당시 그는 몹시 나약해져있었고 피아노 건반 위에 손가락조차 대지 못할 정도로 지독한 만성우울증에 시달렸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남을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때 라비는 알렌에게 어떠한 구원이나 위로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감정적으로 마이너스가 되는 존재였다. 반년의 치정 끝에 결국 라비가 먼저 이별을 선언했다. 제발 나를 더 이상 힘들게 하지 말라던 마지막 말을 떠올리건대 분명 기분 좋은 끝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라비가 살갑게 구는 것이 알렌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로망에게 인사도 하지 못하고 곧장 호텔로 돌아온 알렌은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라비의 페이스에 속수무책으로 넘어간 것도 문제지만 제대로 된 사고회로도 거치지 못하고 무례한 언어를 즉각적으로 내뱉은 것에 대한 자괴감이었다. 알렌은 자신이 그토록 감정적인 사람이었는지 오늘 처음 알았다. 무엇보다 헤어진 연인에게 악의를 가지고 집착하는 남자라니……. 제 자신이 몹시 끔찍하게 느껴져서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한참이나 혼자 자책하던 알렌은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게 지치고 나서야 어기적어기적 샤워실로 향했다. 찬물로 온몸을 적시고 끊임없이 생각을 버려나갔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이 타일에 고여서 흐르는 모양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데, 문득 거울에 비친 얼굴이 꼴 보기 싫을 만큼 멍청해보였다. 정신 차리자고 두 손으로 양 뺨을 가볍게 찰싹찰싹 때렸다. 




“어라, 워커 씨도 이 호텔에 묵으세요?”




머리를 대충 말린 후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뷔페로 내려와서 촬영 스탭진들과 마주친 것은 어제 오후부터 줄곧 이어진 불운의 연장선이었다. 대체 왜 계속 만나는 거냐며 울먹이는 속내를 감춘 채 어색하게 인사하자 말릴 틈도 없이 그들과 동석하게 되었다. 맞은편에 라비가 앉은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지만 양옆에서 작업에 대한 얘기가 분주하게 오가는 가운데 빠져나갈 타이밍을 놓쳐서 깨작깨작 식사했다. 



듣자니 오늘 촬영은 실패로 끝났다고. 평소에도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있는 로망이 작중 가장 애착을 가지는 장면이라 오늘따라 더 까다로웠다며 스탭들이 절레절레 손사래를 쳤다. 파스타의 면을 포크로 돌돌 말면서 알렌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들의 한탄을 엿듣다가 이내 흥미를 잃었다. 결국 그에게는 알 수 없는 세계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낯선 장소, 낯선 언어 그리고 낯선 집단. 그 모든 것들이 총체적으로 알렌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어쩐지 불청객이 된 기분이라 그냥 일찍이 그릇을 비웠다. 자리를 정리하려는데 옆자리에 앉은 카메라 감독이 벌써 일어나느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속이 안 좋아서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살짝 미소 지어보이며 목례했다. 서둘러 떠나려는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알렌을 붙잡았다.




“그러고 보니 로망에게 들었는데, 워커 씨는 라비랑 어떻게 알게 된 사이예요?”




흠칫, 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스탭들의 시선이 곧장 이쪽으로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 알렌은 순간적으로 어찌할 줄을 모르게 되어버렸다. 수많은 생각들이 교호하고 있었으나 그중 입 밖에 낼만한 것들은 없었다. 그저 귀 뒤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냥, 어쩌다보니……. 애매한 말투에 그들의 눈빛이 의아한 기색을 띄기 시작해서 아차 했다. 솔직하게 말할 생각일랑 없지만 그렇다고 탁월한 거짓말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슬슬 왠지 더 이상 대답을 뜸 들였다간 위험해질 수 있겠다 싶은 순간, 심드렁해 보였던 라비가 갑자기 툭 끼어들었다. 




“마나가 살아있을 때 소개로 만났어. 내가 팬이었거든.”




딸기가 토핑 된 치즈타르트를 포크로 먹기 좋게 잘라 입에 넣으며 라비는 그치? 하고 알렌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얼굴이 너무나 능청맞아서 멍청히 보다가 허둥지둥 그렇노라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 대답이 사람들의 흥미를 떨어뜨린 것인지 화제는 금방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알렌은 라비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   *   *







마나는 알렌이 잉글랜드 리즈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것이 퍽이나 기쁜 모양이었는지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니기에 여념이 없었다. 고작해야 국내 주니어 대회인걸요. 볼멘소리로 하는 만류에 마나는 오히려 더 호들갑을 떨며 알렌의 머리를 쓰다듬고 칭찬해주었다. 피아노를 시작한지 3년 만에 입상하는 건 여간 대단한 일이 아니라면서 특유의 과장된 웃음을 지어보였다. 알렌은 부끄러운 맘에 괜히 검은 건반을 검지로 통통 건들며 딴청을 부렸지만 그게 내심 싫지는 않았다. 마나 워커는 그에게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남자였다. 그런 자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싫을 리가 없다. 



알렌의 트로피는 거실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액자와 함께 놓여졌다. 마나는 매일 그것이 진열된 선반을 깨끗하게 닦고 관리했다. 그는 자신이 입양한 아이가 자신을 따라 피아노를 시작했으며, 거기에 그치지 않고 놀라운 재능을 보인다는 사실이 몹시 즐거운 기색이었다. 그에겐 아들인 동시에 제자이자 동료인 셈이었다. 처음 피아노를 배운 계기는 비록 마나의 권유 아닌 권유였지만, 알렌은 분명 서서히 흥미를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마나의 작업실에 웬 낯선 손님이 방문했다.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눈이 마주치자 실없이 웃는 것이 썩 좋은 느낌을 주진 못했다. 참, 인사해. 이쪽은— 마나가 뒤늦게 소개를 해주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별로 관심 없었다. 애초에 마나와 단 둘만의 공간이라고 여겼던 곳에 누군가가 침입한다는 것 자체가 알렌은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중에서 가만히 두 개의 시선이 얽혔다. —그래서 널 만나보고 싶었대. 치기에 빠지기 쉬운 열아홉의 어린 소년은 그 말이 곱게 믿기지 않았다. 잘 부탁한다며 내밀어진 손을 잡았던가, 아니면 그저 노려보기만 했던가. 기억해내려는 찰나, 지겹게 울리는 벨소리에 눈이 떠졌다. 



컨디션도 영 좋지 않은데다가 간만에 꾸지 않던 꿈까지 꿔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잠에서 깨고도 한참동안 일어날 생각 없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벨소리가 한번 끊겼다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알렌은 더듬더듬 팔을 뻗어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리나리였다. 




“네, 리나리.”


[잘 도착했어? 이틀 동안 연락이 없어서 걱정했잖아.]


“경황이 없어서요. 죄송합니다.”




잠긴 목을 꾹꾹 누르면서 알렌이 상체를 일으켰다. 시계를 보니 아침 9시였다. 슬슬 체크아웃을 준비해야 했다. 어쩐지 기분 좋아 보이는 리나리의 음성을 들으며 알렌은 어깨와 귀 사이에 핸드폰을 끼우고 아침식사를 룸서비스 주문했다. 스탭들은 이미 새벽에 떠났을 테지만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서였다. 방 정리를 하며 얼마 없는 짐과 여행용 책자도 챙겼다. 




[프랑스는 어때, 알렌?]


“좋아요. 맛있는 것도 많고…….”


[역시 알렌다운 감상이네.]




리나리가 작게 웃었다. 다음 행선지는 어디로 정했느냐는 물음에 알렌은 잠깐 고민하다가 지도를 펼쳤다. 그러고 나서 아무렇게나 손가락이 집히는 곳을 말했다. 몽생미셸, 옹플레흐, 그리고 에트르타. 즉흥적으로 짠 것치곤 나쁘지 않은 플랜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주일의 휴가 기간 중 남은 5일마저 이렇게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생애 첫 여행이었으니까. 그러다가 불현듯 떠오른 할 말이 있었다. 맞다, 리나리.




“저, 라비를 만났어요.”


[……응? 뭐?]


“아. 룸서비스 도착했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줄게요.”


[저기, 알렌, 알렌?!]




전화로 하려면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뭐 어차피 길게 할 생각도 없지만. 알렌은 전화를 끊고 곧장 휴대폰 전원을 눌러 종료시켜 놓았다. 이번 여행에 더는 어떤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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