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망은 프랑스가 낯설 알렌을 위해 가이딩 해주겠다고 선뜻 말했지만 알렌은 그가 현재 얼마나 영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사양했다. 대신 기본적인 불어 회화 몇 마디가 정리된 메모지를 받았다. 흔한 인사말에서부터 긴급 상황 시의 도움 요청 매뉴얼까지 사려 깊게 적혀져 있었는데 그중 알렌이 가장 유용하게 사용한 것은 ‘얼마인가요?’와 ‘잘 먹었습니다’였다.
로망은 한 치의 여지없이 좋은 사람임에 분명했다. 다정할뿐더러 뛰어난 처세술로 원만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묘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알렌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로망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더라면, 지금보다 더 스스로가 구차하고 비참하게 느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간 로망의 배려 덕분에 여행은 순조로웠다. 지베르니에서 길을 잃었을 땐 현지인에게 서툴게나마 다음 도시로 가는 차편을 물을 수 있었고 그런 식으로 몇 번 말을 주고받다 보니 금세 친해졌다. 그는 작은 제과점을 운영하는 노주인이었는데 배낭여행을 하는 외국인 방문객에게 선심을 베풀고 싶었던 모양인지 잠깐 쉬다 가라며 손을 잡아끌었다. 이윽고 테이블 위에 내어진 것은 달콤하고 폭신한 마롱크림이 올라간 몽블랑이었다. 노주인은 자신은 한때 파리에서 유명한 파티쉐였으나 불의의 사고로 제자를 잃었으며 지금은 출세욕을 내려놓고 자적하는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고 먼저 말문을 텄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것은 종종 괜찮은 감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알렌은 추임새나 첨언 따위는 하지 않고 짐짓 진지하게 귀담아 들었다.
언젠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길 바란다는 말로 제과점 노주인과 작별인사를 한 후 길을 떠났다. 마지막 종착지인 에트르타는 햇살이 아름다운 해안가 도시였다. 그는 이곳에서의 여행을 마치면 다시 배를 타고 영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파도에 가파르게 깎아내려진 절벽과 그 위에 한적하게 군락을 이룬 마을의 동화 속 그림 같은 풍경을 사진 찍은 뒤 선편을 예매하기 위해 인근 항구까지 또 이동했다. 매표소 직원은 런던행 티켓과 알렌의 얼굴을 흘끔 번갈아 보더니 넌지시 비행기를 이용하면 두 배 이상 시간이 절약되며 가격도 별반 차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그에 알렌은 그냥 웃었다. 고소공포증이 있어서요. 그 변명이 그럴듯해 보였을는지는 잘 모르겠다.
-도착하면 연락해.
한동안 죽어있던 핸드폰을 켜자 제일 먼저 리나리의 문자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더랬다. 그녀도 나름대로의 걱정을 하고 있었을 터인데 오랜 친구에게 무책임하게 군 것 같아서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고마워요, 라고 답장을 보내려다 고민 끝에 그냥 지웠다. 문자로 보냈다가는 진실 되어 보이지 않을 테니까.
-도착했습니다. 별 일은 없었어요.
고작 일주일이 비었던 집에서는 서늘한 바람 냄새가 났다. 집을 이토록 길게 비운 것은 홀로 남겨진 이후로 처음이었다. 오후의 노을빛이 창문 사이로 새어들어 왔고 그 가운데 먼지가 나풀나풀 날아다니고 있었다. 알렌은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마자 온 집안의 불을 다 켜놓은 후 TV를 높은 음량으로 틀었다. 한참 멍하니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다리를 떨다가 무작정 박차고 일어나 요리를 시작했다. 식빵과 햄을 굽고 양상추를 꺼내 도마 위에 올렸다. 칼질이 영 서툴러 검지를 베였지만 다행히 피는 나지 않았다. 그날 저녁은 샌드위치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은 이전까지와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외주 작업을 하고 레슨을 다녔으며 남는 시간에는 여전히 피아노를 연주했다. 프랑스에서 겪었던 지독하리만큼 기막힌 우연과 비일상적인 경험은 너무나 유리된 나머지 오랜 인상이 남지 않았고 알렌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가끔 로망과 작업에 관한 메일을 주고받았지만 그뿐이었다. 그때 알렌은 문득 지금 이대로가 자신에게 가장 걸 맞는 상태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니 실제로 어떤 것도 그를 자극하지 않았다. 어쩌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분을 무의식적으로 왜곡시키다가 끝내 둔감해져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분명 여행은 좋은 경험이었으나 알렌에게 있어 일말의 유의미도 되지 못했음 역시 확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건 평생 자신의 굴레였던 런던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까? 마나의 말처럼 과거로부터 탈피하는 데에 오히려 실패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평화로운 며칠이 무감하게 지났다. 영화의 테마곡 작업이 막바지에 달했을 쯤 저장되지 않은 숫자로 전화가 걸려왔다. 알렌은 잠깐 의문에 빠졌지만 그다지 깊이 고심하지는 않았다. 수신버튼을 슬라이드 하자마자 상대 쪽에서 먼저 말을 가로챘다. 그건 몹시 다급한 내뱉음이었다.
[알렌.]
그 목소리를 듣고서 우뚝 굳어버렸다. 혹시 환청인가 싶어 액정을 확인했다가 다시 귀에 대었다. 그러나 연달아 들리는 것들은 현실이었고, 순간 무언가가 목 언저리에서 턱 막혀버리는 감각을 느꼈다.
[나 헤어졌어.]
“……네?”
[로망이랑 헤어졌다고. 지금 당장 나와. 집 앞이니까.]
* * *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고아원에서 자랐다. 어떤 사람들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 알렌을 동정할 터이나 기실 떠올려보면 그렇게 불행하진 않았던 것 같다. 원장수녀는 모든 아이들에게 공평한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훌륭한 교육자였다. 뭐, 물론 결핍적인 유년기였음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남들이 마땅히 누리는 것들, 이를테면 사치스러운 장난감이라든지 달콤한 간식, 말쑥한 새 옷, 혹은 이루어질 수도 있을지 모를 꿈과 부모님의 아가페적인 사랑……. 그러니까 알렌은 필연적으로 그런 것들에 대해 막연한 환상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소유하게 되었을 때는, 하루아침에 자신에게 갑작스레 주어진 권리에 두려움을 느꼈다.
친아버지처럼 대하렴. 그렇게 들어도 알렌은 친아버지를 가져본 적 없었으므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저 또 다시 모든 걸 잃어버릴까봐, 단지 그게 무서웠을 뿐이다. 작은 발걸음조차 조심스러웠고 언제나 눈치를 살피며 행동했다. 그런 몇 년이 흘렀을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줄곧 알렌의 모습을 지켜보던 마나가 문득 한숨을 내쉬더니 할 말이 있어보이는 얼굴로 시선을 차분히 맞춰왔다. 입은 분명 웃고 있는데 눈이 슬퍼보였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지레 겁먹어 본능적으로 자리를 피하려는 알렌의 조그만 양 손이 마나에게 꼬옥 붙들렸다. 나는 널 아프게 하지 않아. 그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자 알렌의 호흡도 차츰 떨림이 잦아들었다. 이내 잠깐의 침묵. 잠시 후 알렌이 안정된 것을 확인한 마나는 상처 입은 작은 새를 달래듯 부드러운 어조로,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만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물론 사랑을 포함해서 어떤 가치들은 여전히 알렌에게 과분하고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게 여겨졌지만, 어쨌거나 그 말이 그의 전부를 바꿔놓았다.
대충 옷을 걸치고 나온 현관 앞에는 라비의 은회색 세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연락도 없이 대체 무슨 일이냐며 따졌건만 라비는 대답하지 않은 채 창문을 조금 내려 타라고 가벼이 고갯짓했다. 설명은 나중에 해줄게. 뻔뻔하게 뜨는 눈에 알렌은 인상을 찡그리다가도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조수석의 문을 열고 탑승하자 라비는 기다렸다는 듯 출발시켰다.
“런던에는 언제 돌아왔어? 계속 연락이 안 되던데.”
“그러는 라비는 프랑스로 영영 떠난 거 아니었어요?”
“나야 뭐 기분 따라 여행하는 거지.”
헤어졌다면서 무턱대고 나오라더니 그런 것치고 라비는 의외로 심상하게 굴었다. 서랍을 뒤져 찾아낸 과일맛 사탕을 먹으라며 던져주거나 간간이 침묵을 깨기 위해 시답잖은 농담을 하기도 했다. 허나 그 모습에서 이번에 알렌이 느낀 것은 몰이해나 불편함이 아니라 도리어 안도감이었다. 그의 가벼운 연애 편력에 예외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동시에 알렌은 스스로가 지극히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좋게 포장해봤자 꼴불견처럼 남의 실연에서 위안을 찾고만 셈이었다. 무엇보다 그 대상이 라비라는 점에서 그를 의식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필경 또 다시 모든 게 제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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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전개에 퀄리티 떨어져도 개강전에 완결 내려고 그런 것이니 좀 봐주시길...
7편 완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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