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
“자, 이제부터 수를 셀 거예요. 하나, 두울, 셋……”
아이들이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크리스마스 날 받고 싶은 선물에 관한 기도를 하는 동안 알렌은 창틀에 기대어 새로 들어온 동화책을 심심풀이 삼아 넘겨보고 있었다. 부엌에선 빵을 굽는 듯 달콤한 냄새가 풍겨왔고 거실 중앙 커다란 트리에는 곧 각자의 소원쪽지가 걸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고아원 측에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이라곤 후원 받은 스웨터나 목도리, 털모자 따위가 전부였으니까 결과적으론 아이들에게 실망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알렌은 왠지 아이들의 순수함을 기만하는 행동을 하는 것 같아 어제부로 내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렬로 늘어선 조그만 뒤통수들을 응시하는데 지도 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미소가 꽤나 호감상의 중년이었다.
“워커 씨도 소원 하나 적어보는 게 어때요?”
“아, 저는 딱히 소원이 없어서…….”
“재미없는 어른이네. 그래도 하나 쯤 있을 거 아녜요? 뭐, 부자가 되게 해달라든지.”
기실 없을 리가 만무하다. 요 몇 달간 알렌의 삶은 절실히 그 기원을 이룩하기 위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적나라한 과거를 드러내는 것이었으므로 섣불리 말하기엔 부끄러운 말이었다. 원체 거짓말을 잘 못하는 알렌이 영 망설이면서 대답을 꺼려하자 그는 눈썹을 크게 씰룩거리더니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신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알렌이 봉사활동을 다니는 고아원은 성당과 맞닿아있다. 동네 언저리의 작은 성당이지만 제법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낡은 벽시계가 걸린 종탑이 가운데에 우뚝 자리 잡고, 양 옆으로 각각 미사당과 고아원이 납작하게 붙어있는 모양새다. 언뜻 학교처럼 생기기도 했다. 알렌은 신을 믿지는 않았으나 성당이 가진 엄숙한 매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동의했다. 성당에는 특유의 그리운 냄새가 났으며 사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적당한 온도를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단상 위에 오르간이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알렌의 마음에 들었다. 비록 사용하지 않은지 오래되어 먼지가 뽀얗게 앉고 조율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지만 현대식 피아노와는 다른, 오르간만의 로맨틱함이 있었다. 탁한 건반음과 낮고 웅장하게 퍼지는 파이프의 소리. 같은 곡이라도 오르간으로 치면 비교적 무게감 있는 연주가 된다. 언젠가 알렌은 몰래 성당의 오르간을 연주해보려다가 원장수녀에게 들킨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치고 싶으면 언제든 와서 쳐도 된다고 흔쾌히 허락해준 이후로 종종 이곳을 방문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그녀와 대화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 대화의 전개방식은 어쩐지 고해성사의 그것과 흡사했지만.
“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가 곧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곳에 자원봉사 하러오는 사람들 모두가 그래요. 남을 구원하는 것 같지만 사실 스스로를 구원하고 싶어서 오는 거죠.”
“그렇다면 그건 저의 위선일까요?”
“사랑에 위선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경너머로 주름진 눈이 부드럽게 접혔다. 알렌의 생애를 두 번 합친 것보다 나이 많은 연장자인 탓인지 아니면 수녀라는 고결한 직책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원장수녀는 확실히 알렌으로선 감히 따라할 수 없는 여유로움과 상냥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앞에서 알렌은 자신이 가진 고민이 필경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어떻게 보면 그토록 추구해왔던 삶의 지향점과도 매우 흡사한, 어른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도 그는 어른이었지만 그의 내면세계는 아직도 열아홉의 그날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알렌은 어디에든 제 안의 감정을 표출하고 싶었고 그것은 반드시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자해하는 방식이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메말라왔던 것 같다.
알렌은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꾸욱 눌러 참는 듯한 표정에서 원장수녀는 어떤 사연 같은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 들르는 이들은 모두 각자의 이야기가 있으며, 대상화된 공감이 아닌 사적인 주체로서 보여지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섣부른 조언 대신 조심스러운 언어만을 골라 문장을 완성했다.
“사랑은 원래 주는 쪽이 더 행복해지는 거랍니다.”
그때 문득 알렌은 기억 속에서 두 개의 목소리를 동시에 떠올렸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만 사랑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사람들은 결국 스스로를 위해 사랑하는 거구나. 그리고 그걸 위선이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는 거였다고. 알렌은 고개를 들어 커다란 십자고상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까보다는 개운한 얼굴로. 네. 이제 알 것 같아요.
* * *
라비를 마지막으로 만난 날에서 일주일이 지났다. 그 기간 동안 알렌은 정말 의외로 아무런 고통스러움도 느끼지 못했다. 줄곧 가슴에 응어리져 있었던 것들을 공격적으로 토해내서 그런지 그의 속은 오히려 여느 때보다도 차분하고도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한편 알렌은 이러한 안정적인 내면과 일상의 평화에 의아함을 느끼면서, 이것들이 조만간 산산이 부서질 것을 아는 양 불안하게 굴었다. 그는 평생을 비극과 좌절 속에 숨 쉬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것이 어쩌면 자신의 결말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무언가가 무너지기 직전처럼, 허나 완전히 폭삭 내려앉지 않고 아슬아슬함만을 유지하는 불안한 상태로 살아가게 되면 어떡하나 두려워하고 있었다. 결국 알렌은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았으며, 그걸 애써 떠올리지 않는 건 끝을 맺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고 마는 것임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날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술을 먹고 취했다. 그냥 술을 마신다는 기분만 내고 싶었을 뿐인데, 마시다보니 조절이 안돼서 와인 한 병을 혼자 다 비워버렸다. 원체 술이 약한 편이었기 때문에 고작 한 병에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필름이 끊길 정도였다. 아침에 알렌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식탁 위에 엎드린 상태 그대로였다. 어깨가 결리고 머리가 지끈거렸으며 온몸이 천신만근 무거웠다. 알코올중독자들이 이해가 갈 정도로 술에서 깬다는 건 끔찍한 기분이었다. 두 번 다신 술을 마시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알렌은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제멋대로 벗어놓은 외출복을 정리해 옷걸이에 걸어놓은 후 밀린 설거지를 했다. 그 다음 소파 위에 쓰러지듯 깊게 앉았다. 휴식이 필요했다. TV를 아무 채널이나 틀어놓고 한나절 가량 확인하지 못한 핸드폰을 켰다. 부재중 통화목록을 확인하는 순간, 알렌은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미쳤다…….”
다름이 아니라, 라비에게 자신이 다섯 번이나 전화를 건 것이다. 그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다섯 번의 부재중 발신 후에 한 번의 착신이었다. 그것도 무려 1분간이나 통화를 했다. 차라리 한 문장, 아니 한 단어라도 생각이 나면 다행인데 지우개로 머릿속을 말끔히 지운 것처럼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짐작조차 안 됐다. 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던 때의 전화니까 평범한 대화를 했을 거라곤 예상하지 않지만, 그 점이 가장 참혹하게 느껴졌다.
하루 종일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와 자책을 반복하는 동안 마침내 결심이 선 것은 저녁이 되어서였다. 그래, 사과를 해야 했다. 모든 게 미안했다. 미안하고 미안해서, 그게 자꾸 맘에 걸렸다. 혹여 그가 받아주지 않더라도 말하고 싶었다. 당신을 만난 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고 영광이며, 그토록 과분한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도 갈 곳 잃은 아이처럼 제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을 거라고. 혼자만의 힘으로는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오만하게도 그걸 몰랐다. 심장에 멍이 든 것처럼 물크러지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으로 다이얼을 눌러 전화를 거는데 없는 번호라는 안내 음성이 흘러 나왔다. 심장이 철렁해서 몇 번이고 번호를 확인했지만 수화기너머의 목소리는 그 횟수만큼 같은 말을 읊어주었다. 그때 알렌이 망설임 없이 한 행동은 로망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그에게 껄끄러움이나 불편함 따위는 더 이상 없었다.
로망은 수신음이 세 번쯤 흘렀을 때 전화를 받았다. 파티장에 있는 것처럼 주변이 소란스러웠고 목소리가 들떠있었다.
[오, 알렌 씨 어쩐 일이에요? 이 시간에 먼저 연락을 다 하시고.]
“죄송합니다, 혹시 라비랑 연락되시나요?”
[라비요?]
숨조차 쉬지 않고 다급하게 내뱉는 알렌의 물음에 로망은 잠깐 침묵했다. 그는 눈치가 빠른 타입이니까 어쩌면 이 모든 상황을 진작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누가 봐도 알렌 워커와 라비라는 사람은 오래된 친구라기엔 서먹했고 얼굴만 익힌 지인이라기엔 서로에 대해 너무나 예민했던 것이다. 아아. 저에게도 시사회 끝나고 전화 한통 없네요. 그 말에 알렌은 밑도 끝도 없는 절망을 느끼며 마른세수를 했다.
[참, 그러고 보니.]
알렌이 피곤한 눈을 떴다. 그 순간 로망의 목소리는 뭔지 모를 기색을 담고 있었다.
[라비가 크리스마스에 그리스에 있을 거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시계를 보았다. 8시 30분. 크리스마스까지는 아직 하루하고도 세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알렌은 부랴부랴 코트를 꿰어 입고 차키를 챙겼다. 현관문 도어락을 여는 소리가 들린 모양인지 로망이 크지 않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동네인지까지는, 글쎄, 직접 가보지 않는 이상 모르겠죠?]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벌컥 문을 열자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리나리와 눈이 마주쳤다. 리나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렇게 황급히 어디 가는 거냐고 깜짝 놀라 물었다. 알렌은 그녀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하기엔 시간이 촉박하다고 생각했다. 인사조차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속으로 거듭 사과한다.
“그리스에 가요!”
“그리스?! 이 시간에?”
“나중에 얘기해줄게요!”
“알렌, 잠깐, 오빠가 케이크를 구웠는데!”
“지금이 아니면 영영 늦어버린다구요!”
서둘러 주차장으로 가면서 코무이도 만났다. 리나리를 기다리는 듯 코무이는 길가에 잠시 차를 대고 있었는데 그녀 대신 알렌이 내려오자 몹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알렌은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이윽고 말없이 차를 끌고 나왔다.
“아, 현관문 좀 잠가주세요. 그리고 고마워요. 리나리, 코무이 씨.”
황당해하는 그들을 지나쳐 기어를 올렸다. 크리스마스이브라 도로는 한껏 정체되어 있을 것이다. 정각까지 공항에 다다를 수 있을까. 또 그리스까지 가는 항공편이 남아있을까. 온갖 걱정이 머리에 떠올랐지만 휘휘 고개저어 떨쳐냈다. 핸들을 빠르게 돌리면서 알렌은 이제야 태어나서 항상 누군가에게 사랑받아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지 않았으면 지금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었을 것이다. 마나 워커, 리나리와 그녀의 오빠인 코무이, 자신의 학생들, 고아원의 선생님과 수녀님, 그리고 라비. 이 삶을 부지할 수 있도록, 그에게 결코 잡은 손을 놓지 말라며 소리쳐 붙잡고 때로는 자극시키면서…….
저는, 있잖아요.
라비, 저는………
알렌은 무언가가 목구멍에 걸린 듯 숨을 가쁘게 쉬었다. 꽉 막힌 도로에서 알렌은 수 년 간 자신을, 그리고 제 주변 사람들을 괴롭혀온 공황상태를 다시금 경험했다. 눈앞이 흐릿해져서 끊었던 신경안정제를 급하게 한 알 삼켰다. 조금만 쉬면 괜찮아질 것 같다. 도로정체가 이렇게 다행일 수는 없을 것이다. 바깥에서는 시끄러운 클락션 소리가 연신 들려왔지만 알렌에게는 그저 먼 곳의 것처럼 아득하게 들리기만 했다. 자정에 점차 가까워지는 시계를 보면서 그는 왠지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어라, 하면서 닦아내는데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끝이 없었다. 코트소매가 흠뻑 젖었다. 메말랐던 지난 시절을 뒤늦게 참회하고 있기라도 한가 보다. 이윽고 길이 조금씩 뚫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엑셀을 밟으며 알렌은 젖은 뺨을 슥슥 닦고, 다신 나약해지지 않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라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무너지는 심장 가운데 그런 영문 모를 확신이 들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절대 런던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멈춰있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아주 느린 속도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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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및 해설은 이쪽 입니다. 비번은 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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