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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턴어라운드

[알렌라비] 턴어라운드 7













라비와 마주쳐야만 하는 날짜가 다가올수록 알렌은 멍하니 있는 횟수가 늘어가고 있었다. 그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몇 개월 전 라비와의 만남으로 지난 과거들을 모조리 다 청산했으며, 또한 더 이상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려 그와 저녁식사를 하고 침대를 내주거나 선뜻 피아노를 쳐줄 수 있을 리가 만무했으리라. 알렌은 요즘 스스로를 성찰하는 일에 굉장히 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감정이 결단코 미련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마침내 라비의 존재 자체가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삶의 방식부터 시작해서 관철하는 가치관이나 신념, 걸어온 길까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애초에 서로 백해무익할 뿐인 관계였던 거다. 그래, 처음부터 이걸 깨달았어야 했다. 새까맣게 타버린 토스트에 달디 단 초콜릿 잼을 치덕치덕 바르며 알렌은 두 번 다신 한심하게 살지 않겠다던 결심을 다시금 되새겼다.



12월이 되자 날씨가 급격하게 추워졌다. 특히나 평소에도 하늘이 흐리고 우중충한 런던은 낮이 짧아질수록 해가 잘 들지 않기 일쑤라, 체감기온이 일기예보보다 두 배는 더 떨어졌다. 그즈음 알렌이 살고 있는 마을을 포함한 웨스트민스터 시내는 벌써부터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분수대 앞에 구세군 자선냄비가 설치되었고 가로수에는 트리 전구가 휘감겼다. 알렌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아원 아이들에게 나눠줄 선물에 대해 고민하며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갖고 싶은 것을 적은 편지를 차근차근 넘겨보던 그는 ‘부모님’이라고 써진 장에서 손을 멈칫했다. 온풍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한 순간이었다. 그는 잠깐 눈을 느리게 감았고, 다시 천천히 떴다. 연필심을 힘껏 꾸욱 눌러쓴 자욱이 울퉁불퉁 선명한 글씨 위를 부드러이 쓰다듬곤 잘 갈무리하여 서랍장에 보관했다.



그날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눈이 내렸다. 거리를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가느다란 눈발을 목격한 알렌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손바닥 위에 닿으면 사르르 녹아버릴 정도로 형체 없는 눈이었지만 어쩐지 놀랍도록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첫눈을 미처 보지 못하고 강박증과 공황에 시달리는 겨울을 보냈던 게 언제부터였던가. 저도 모르게 우뚝 제자리에 멈춰선 그때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건, 제 생일이었다.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고아원에 거둬진지라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 수 없었으나 마나가 정해주었던 그 날짜. 몇 년 동안이나 그걸 잊고 살았던 것이다. 어쩐지 아득하니 인지적 영역이 현실과 분리되는 기분이 들었고 제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이 두 손과 팔다리, 그 내부에 흐르고 있을 피와 지금 숨 쉬고 있다는 사실까지. 그러고 나서 알렌은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찾듯이 거리를 휙휙 둘러보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두가 각자의 갈 곳을 향해 발걸음을 바삐 하고 있었으며 그는 한복판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이달의 둘째 주 금요일은 금방 찾아왔다. 장소는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그곳에서 매년 자그마한 독립영화제가 개최된다고 한다. 제대로 정장을 차려입는 것은 거의 5년만이었는데, 원래 입던 건 너무 작아져 새로 하나 맞추었다. 검정색 자켓과 팬츠, 회색 베스트, 그리고 흰색 와이셔츠의 가장 무난한 디자인이다. 매장 점원은 무척이나 잘 어울리신다며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해댔었지만 알렌이 보기에 전신거울에 비친 모습은 꽤나 어색했다. 외출 준비를 다 하고도 넥타이 매는 법을 몰라서 한참동안 혼자 헤맨 후에야 집을 나선다.



영화제는 상상했던 것과 사뭇 달랐다. 그곳에 참석한 이들은 지나치게 독특하고 괴짜스러워 보였으며, 한편 예술가적으로 느껴졌다. TV에서나보던 엄숙하고 우아한 연회장보다는 마치 축제 같았다. 알렌이 여태껏 살면서 가본 어느 곳에 비교해 보아도 화기애애하고 떠들썩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괜히 참관객석 근처를 서성이던 알렌은 갑자기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깜짝 놀라선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이름은 다 기억나지 않아도 익숙한 면면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이윽고 건네 오는 악수에 알렌이 얼른 미소 지으며 화답했다.




“오랜만이네요, 워커 씨.”


“네. 반갑습니다.”


“촬영장에서 구질구질한 모습만 보다가 이런 자리에서 만나니까 뭔가 새롭지 않아요?”




확실히 다들 촬영장에 있을 당시에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피곤에 찌들어 있었지. 그건 라비와 재회한 직후의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와 한차례 인사를 마친 알렌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무리에 합류했다. 낯선 장소에서 아는 얼굴들과 함께 있는다는 건 생각보다도 훨씬 큰 안도감을 주었다.



로망과는 그 뒤로 조금 늦게 만났다. 이마를 덥수룩하게 덮던 앞머리를 헤어 젤로 넘겨 올리니 안 그래도 부리부리한 눈매와 훤칠한 인상이 더욱 돋보였다. 그는 알렌을 보자마자 환영한다며 격하게 포옹을 해왔다. 당황도 잠시 그냥 하하 웃어버렸다. 하여간 특이한 캐릭터라고 생각하지만, 내심 그 개성이 부럽기도 하다.



영화제는 이번이 처음일 테니 구경시켜주겠단 명목 하에 로망은 알렌을 이끌고 행사장 여기저기를 데리고 다녔다. 사실 그건 좀 부담스러웠다. 그는 누구를 마주쳤다하면 “이쪽은 영국의 유망한 피아니스트인 알렌 워커 씨입니다.”하고 소개시켜주고 싶어 안달 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작 19살 때 주니어 콩쿠르에서 우승한 것 말고는 내세울만한 대외성적이랄 것이 없는 알렌으로서는 곤혹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이 너무 좋아도 문제구나. 그런 그의 얼굴을 읽은 듯 촬영팀은 못 말리겠단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영화제 시작이 차츰 가까워졌다. 지정석으로 이동하면서 알렌은 아직까지도 그림자 하나 비치지 않은 라비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아차 했다. 이제는 일절 그에 대해 신경 쓰지 않기로 했었다는 걸 잠시 까먹고 있었다. 안내에 따라 자리에 착석하는데 뒤에서 제작진의 일부로 추정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듣고 싶지 않아도 귀가 열려있어서 그런지 절로 쫑긋해졌다.




“그러고 보니 라비 씨는 아직 안 왔나요?”


“라비 씨라면 조금 늦는다고 로망에게 들었어요. 시애틀에서 온다던가…….”


“뭐, 시사회 전까지는 도착하겠죠.”




……하기야 라비라면 영화의 원작자니만큼 확실히 안 올 수가 없는 자리일 것이다. 괜한 걱정을 했다고 느끼며 알렌은 개막식을 알리는 음악소리에 시선을 무대 위로 고정하고, 가능한 다른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집중했다. 







*   *   *







알렌이 라비의 도착 소식을 안 것은 1부가 거의 다 끝나갈 때였다. 시사회는 1부를 마무리하는 행사였으므로 라비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 전달받느라 알렌이 있는 쪽의 테이블은 꽤나 소란스러웠다. 마침내 시사회에 앞서 로망이 총감독으로서 인사를 위해 계단을 걸어올라가고, 다들 포기한 채 탄식하고 있는 순간에 라비는 갑자기 무대 뒤에서 나타났다. 급하게 도착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한 작태와 번한 얼굴로 여유롭게 생긋 웃고는 로망의 옆에 섰다.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과 반가움이 섞인 야유가 동시에 들려오는 가운데 알렌은 나란히 수트를 차려입은 두 사람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보니 제법 어울리는 것도 같다. 특히나 많은 사람 앞에 서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뻔뻔함이라든지 분위기를 능숙하게 이끌어가는 처세력이 몹시 닮아 있었다. 지난번에 로망이 말한 ‘우리 같은 사람들’이란 결국 저런 것 따위들을 말하는 거였을까. 그렇다면 역시 라비와 저는 성향적으로 보건대 결코 만나선 안됐던 운명인가 보다. 조용히 입맛이 씁쓸해졌다. 



결국 알렌은 본격적인 영화 상영이 시작하기 전에 자리를 빠져나왔다. 후문의 정원은 사람이 없어 한산했다. 그는 벽 쪽에 쪼그려 앉아 그냥 그 상태로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있었다. 그 증세는 근 한 달간보다 조금 더 심각해져 있었어서, 옆에 누가 다가와 있는지 기척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알렌, 하고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이름을 불렀을 때서야 뒤늦게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었다. 화들짝 놀라 시선을 드니 라비가 벽에 기대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로. 그 장면이 어쩐지 영 현실감 느껴지지 않았기에 알렌은 금방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또 보네.”


“……그렇네요.”




더는 앉아있기 싫었으므로 무릎을 탁탁 펴고 일어났다. 그때 알렌을 슬쩍 바라보던 라비가 갑자기 알렌의 넥타이에 손을 뻗었다. 라비의 옅은 향수냄새가 코끝에 와 닿고, 예상 못한 접촉에 일순 심박동이 빨라지며 알렌은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라비는 엉성한 모양의 매듭을 푼 다음 다시 제대로 매어주고 있었다. 너 넥타이 진짜 못 맨다, 하면서 웃는 것도 잊지 않는다. 울컥했지만 뭐 사실이었으니까 알렌은 어떤 변명이나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리깐 붉은 속눈썹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빤히 쳐다보는 동안 이윽고 완성된 넥타이는 그림처럼 완벽했다.




“얼굴이 좋아 보이는데. 요새는 어떻게 잘 지내나봐.”


“글쎄요. 그냥 늘 똑같이 바쁘게 살죠.”


“대답이 예외인걸.”




그 다음 알렌은 시침이라도 떼듯 일부러 라비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러자 라비 또한 굳이 눈을 맞추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라비는 알렌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구름조차 보이지 않는 새까만 밤하늘에 흠집처럼 아주 희미하게 달이 떠 있었다. 나도 너랑 같아. 몇 년 만에 신간 준비를 하고 있거든. 곧 마무리 단계라 좀만 더 작업해야지, 하다보면 금방 시간이 가 있고. 최근에는 집 바깥으로 나가본 기억이 없어. 오늘도 엄청 오랜만의 외출인데, 왠지 기분이 좋네. 말할 때마다 입김이 뿌옇게 새어나올 정도의 날씨여서 얘기를 하기에 딱히 좋은 장소는 아니었건만 두 사람은 코를 훌쩍이고 두 볼이 빨개지도록 그곳에 서 있었다. 대화가 그럭저럭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집이 시애틀에 있어요?”


“어?”


“오늘 시애틀에서 왔다길래.”


“아아. 그냥 렌탈하우스야. 마감만 끝나면 다른 데로 가겠지.”




맘 내키는 대로 이사라니, 부럽네요. 괜히 툴툴거리며 비아냥댔다. 전 세계를 제 앞마당인 것처럼 여행하고 쉽게 정착하는 기분이란 과연 어떨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때 알렌은 수년간 런던 밖을 나서기 두려워했던 제 모습을 떠올린 후, 어찌된 게 우리들은 이 점마저 상반될까, 하고 착잡하게 생각했다. 그것은 언제나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날을 살아가는 라비로부터 강렬하게 박탈감을 느끼는 방식이었으며 동시에 열등한 페르소나를 위시한 자기혐오였다. 무심코 그 사실을 자각하게 된 순간, 알렌은 지금껏 자신을 불편하게 해왔던 것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닫고 말았다. 바로 자격지심이었다. 



실체를 들키자 스멀스멀 새어나온 음습한 감정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목구멍 근처에서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알렌은 공연히 몇 번씩이고 마른 침을 삼켰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진 그를 눈치 챈 듯 라비는 슬쩍 곁눈질로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괘씸하게도, 알렌은 그 행동까지 기분 나빴다. 자신이 지닌 불행한 서사와 그의 안일한 호기심, 만남, 이별, 그리고 동정하는 척 주변을 배회하며 헤집어놓는 위선, 부럽고도 미운 그 자유로움과 눈앞에 있어도 손에 닿을 것 같지 않은 거리감을 포함하여………….




“있잖아요, 라비.”


“왜.”


“이제 와서 묻는 건데.”




숨을 한번 깊게 들이쉬고 천천히 내뱉은 다음 알렌은 가능한 사사로운 화제를 꺼내는 듯한 어조를 표방했다. 진심이지도 않았으면서.




……그때는 왜 사귀자고 한 거예요?”




치열한 침묵이 흘렀다. 



라비는 혼이 빠진 것처럼 굳었고 알렌은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만난 이래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 어쩐지 마음이 크게 뒤흔들렸다. 예상했던 반응과는 달랐던 것이다. 제 안의 라비는 무슨 소리냐고 싱글벙글 미소 지으며 상황을 무마하거나 심드렁히 느물느물 대답을 회피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래야했을 터인데. 대신 그는 비틀거리며 허탈하게 웃었다. 정말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웃음이었다. 




“그래, 그동안 그렇게 생각했던 거구나.”


“…….”


“다시 말해서 나를 못 믿었단 소리네.”




그 말을 내뱉는 동시에 라비에게선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풍겨져 나왔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꾸 두 손을 가만두지 못하고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으며 아랫입술을 새파랗게 질릴 정도로 세게 짓이겨 물었다. 코트 주머니를 다급하게 뒤지기도 했으니까 아마 담배를 피던 시절의 버릇 같았다. 이윽고 마주친 얼굴은, 보고도 믿기지 않았지만, 실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저번에 말했지, 헤어지는 데에 이유는 필요 없다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야.”




라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물기에 젖어들었다. 그 순간 알렌은 이게 아닌데, 싶었다. 이제 의문이든 뭐든 아무 것도 중요치 않게 느껴졌다.




“그때 나는. 내가 충분히, 널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독한 불안증에 시달리던 시절처럼 심장이 죄여오듯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모든 인과를 끊어내면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오히려 정체 모를 ‘어떤 것’이 계속해서 가슴에 통증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니, 문드러진 부분을 아예 도려내고 있었다. 라비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보였다.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차들었다. 이런 감정 따위는 가지고 싶지도, 더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 없이 새로운 자각들이 머릿속에 침범해왔다. 나는, 당신은, 우리는……




“……그런데 정작 그 당사자한테는 그게 부담이 됐다니, 미안하다. 사과할게.”


“아니, 잠시만요, 사과는…….”




라비는 끝내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뒤돌아 자리를 떠났으므로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음만 먹었으면 금방 잡을 수 있는 속도였는데 왜인지 바닥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알렌은 손을 힘없이 떨구었다. 결국 그의 선택은 그를 종적인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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