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토도마츠는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불면증 때문에 예민해진 것인지 아니면 그의 예민함으로부터 불면증이 야기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점점 신경증 환자가 되어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속에서부터 무언가 그를 야금야금 좀먹고 있었다.
처음 토도마츠는 이 불쾌하고도 무례한 감정의 침범의 근원을 찾아 아득히 기억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번 학기에 전공과목이 셋, 이수 필수의 핵심 교양이 하나. 그중 두 과목은 이번 주 금요일 자정까지 제출해야하는 레포트가 있었고 한 과목은 시험 대신 팀프로젝트 평가를 반영한다고 했다. 동아리 여자 후배와의 가벼운 스캔들이라든지 아르바이트 처 사장님과의 작은 불화, 스쳐지나갈 뿐인 사람들이 주는 크고 작은 상처들. 더 헤아려보려다가 무의미한 사색임을 깨닫고 그만 관두었다. 걷잡을 수 없이 감성에 젖어드는 것은 딱히 취미에 없었다.
날씨가 궂었다. 험악한 구름이 잔뜩 으등그러지고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눈이 되다 만 것들이 하늘에서 내리고 있었다. 토도마츠는 분홍색 우산을 펼치며 핸드폰 화면을 의미 없이 껐다 켰다. 불안할 때면 으레 하는 습관이었다. 그가 핸드폰으로부터 얻으려는 안정감이 무엇인지는 스스로도 잘 몰랐다. 그러고 보면 현대인들의 핸드폰에 대한 분리불안을 노모포비아 증후군이라고 한다더라했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겠거니 싶었다.
토도마츠! 이쪽이다. 익숙한 목소리가 퍼뜩 사색을 깨뜨렸다. 눈이 휘둥그레 해진 토도마츠에게로 검은 세단이 가볍게 다가왔다. 차창을 내리고 선글라스를 벗으며 씨익 웃는 얼굴의 주인은 아니나 다를까 카라마츠였다. 이 날씨에 선글라스라니. 이 정도 기행은 이제 우습지도 않다. 못 말리겠다는 듯 혀를 끌끌 차고 토도마츠는 능숙하게 조수석 문을 열었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
“비 오는 날은 애인이 걱정 되니까.”
“나참. 애도 아니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토도마츠의 목소리는 이미 부드러워져 있었다. 자동차 내부 공기는 안온했다. 푹신한 시트에 몸을 깊숙이 파묻자 긴장된 근육이 한껏 이완되고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이때 쯤 잠시 눈을 붙이면 의식적으로 무의식해왔던 사실들에 대해서 솔직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연락이 없어서 서운할 뻔 했어. 내가 가진 불안 증세는 사실 카라마츠 형으로부터 겪는 분리에 대한 것이 아닐까? 하는. 물론 결코 인정하긴 싫지만.
두 사람은 햇수로 2년차가 되어가는 연인이었다. 토도마츠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놀랄 수밖에 없을 이야기일 것이다. 그는 확실히 연애에 불성실한 축에 속했고 무엇이든 쉽게 질리는 성정이었으며 개인시간을 억압 받는다든지, 남을 위한다든지 하는 것과는 지구 반 바퀴보다 먼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토록 긴 연애를 순탄하게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저 상대가 카라마츠였기 때문이었다.
카라마츠와는 토도마츠가 스물에서 스물 하나로 넘어가는 겨울, 바에서 처음 만났다. 가볍게 술잔을 기울일 요량으로 간 그곳에서 웬 성가신 놈 하나가 꼬였었다. 신체 부위별로 조각조각 나누어 세밀히 감정한다 하더라도 결코 취향이라곤 할 수 없는 남자였다. 남자는 눈치까지 없어서 그날만큼은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딱 혼자이고 싶었던 토도마츠의 심기를 자꾸만 거슬렀다. 어느 학교 다녀요? 전공은 뭐예요? 하는 등의 귀찮은 질문들에 네네, 하며 예의상의 호응만으로 응하고 있는데 돌연 누군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몹시 자연스럽게 합석한 그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으므로 정확히 가늠은 힘들었지만 제법 괜찮은 피지컬을 가진 사내였다. 토도마츠의 꽤 맘에 든다는 표정으로부터 약간 불안감을 느낀 듯, 계속 추파를 던지던 남자가 잠시 입을 다물더니 곧장 태세를 바꾸었다. 이봐요, 그쪽은 누굽니까? 불량하게 걸려온 말에 선글라스를 쓴 사내가 피식 웃었다.
‘이 녀석 애인 되는 사람이다만.’
‘예?’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누구신지?’
아니, 초면이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토도마츠는 이 사내가 지금 자신을 도우려하고 있음을 알아챘기에 별 다른 첨언을 하지 않았다. 거짓말의 효과는 탁월했다. 곧 남자가 얼굴을 울긋불긋 붉히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토도마츠가 선글라스를 쓴 사내를 향해 좋은 느낌으로 싱긋 웃었다. 고마워요. 사내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이정도로 뭘.
이쯤 되면 알아챌 법하게도, 바로 그 사내가 카라마츠였다. 감사의 의미로 그날 토도마츠는 카라마츠에게 술을 쐈다.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부분을 제외한다면 카라마츠는 괜찮게 유머러스했고 대화를 나눔에 불편함이 없었다. 그날 밤 토도마츠는 번호를 물으며 다음번엔 자신이 밥 한 끼 쏘겠다는 카라마츠의 애프터신청을 받아들였다. 퍽 그가 맘에 들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약속 당일 다시 만난 카라마츠는 굉장히 화려한 스타일이었다. 말이 화려하다지, 솔직히 말해서 부담스러웠다. 민망한 장식이 덕지덕지 달린 라이더자켓하며 광택 나는 가죽바지, 그리고 자신을 향해 느끼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토도마츠는 온몸에 소름이 다닥다닥 돋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고즈넉한 바의 조명과 알딸딸한 술기운이 눈을 삐게 만들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속으로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폼 잡으며 벽에 기대 서 있는 카라마츠를 향해 토도마츠는 성큼성큼 걸어가 단호하게 말했다.
‘미안. 저 사람을 잘못 봤나봐요.’
‘엥.’
‘제 번호 좀 지워주시겠어요?’
...물론 카라마츠는 그리 손쉽게 포기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는 그 후로도 몇 번씩 토도마츠의 학교를 찾아왔다. 암만 무시하고 거절해도 카라마츠는 굽힐 줄을 몰랐으며 지켜보는 쪽이 더 안절부절 할 정도로 상처 주는 말에도 눈썹 하나 꿈쩍 하지 않았다. 결국 먼저 항복한 것은 애초에 참을성 부족한 토도마츠였다. 딱 ‘한번만’이라던 만남은 그 후로도 서너번 더 반복되었고 두 달 정도 지났을까 어느 새 두 사람은 다음 약속 장소를 정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카라마츠는 상냥한 남자였다. 입맛이나 영화취향 같은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잠자리까지 일절 토도마츠에게 맞춰주었다. 사소한 트집이나 말다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연애에 있어서 토도마츠는 언제나 제멋대로 행동하는 ‘갑’이었고 카라마츠는 묵묵히 져주기만 하는 ‘을’이었다. 그것이 당연해보였다.
비 오니까 자고 가도 돼? 토도마츠의 물음에 카라마츠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마츠의 티셔츠로 갈아입은 토도마츠가 침대에 발랑 누웠다. 폭신폭신한 이불에 얼굴을 대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카라마츠의 냄새. 남성용 스킨향이다. 독해서 토도마츠는 별로 선호하지 않는 종류였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카라마츠는 제법 맘에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고 있으려니 카라마츠가 드라이기를 들고 와서 토도마츠에게 손짓했다. 그러면 으레 토도마츠는 얌전히 그의 앞에 가서 앉았다.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는 마디 굵은 손가락과 따뜻한 바람이 느껴졌다.
그 손길로부터, 약간 스위치가 눌린 것 같다. 토도마츠가 갑자기 뒤돌아 머리를 말리던 카라마츠를 제지하고 입술을 부딪쳐왔다. 부드러운 살결 틈새를 벌리고 막무가내로 말캉한 혀를 탐하기 시작했다. 그 기습에 카라마츠는 놀란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이윽고 호응해주었다. 좌우로 얼굴을 돌려가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급한 키스를 했다. 자연스레 손이 서로의 상체를 더듬고 티셔츠를 밀어 올렸다. 익숙한 부근을 쓰다듬으면 오싹한 쾌감이 부르르 전해졌다. 호흡이 점차 가빠졌다. 숨을 쉬기 위해 잠깐 침 범벅된 두 입술이 떨어졌을 때, 타이밍 좋게도 전화벨이 울렸다. 카라마츠의 것이었다. 카라마츠는 멋쩍게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전화를 받았다.
“아, 네. 안녕하십니까, 부장님. 네, 알겠습니다. 지금 곧 가겠습니다.”
“......”
“미안하다, 토도마츠. 부장님께서 급하게 부르셔서.... USB 좀 갖다드리고 올게.”
“응. 다녀와.”
정말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직장일인데, 뭐, 가지 말라고 붙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토도마츠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는 일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에 카라마츠는 잠깐 망설이는 듯 하더니 이윽고 코트를 꿰입으며 차키를 챙겼다. 할 일만 끝내고 곧장 오겠다고 하는 목소리에 자신이 없었다. 그 정도야 눈치 챌 수 있다. 2년 동안 알고 지냈으니까.
토도마츠는 다시 핸드폰을 찾았다. 의미 없이 화면을 껐다 켜기를 반복했다. 그것마저 안정을 주지 못하자 그냥 손에서 던져버렸다. 기지개를 피다가 천장을 향해 발랑 드러누웠다. 몹시 익숙한 벽지와 전등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결혼을 안 한 남자는 회사 내에서 눈치가 보인다더라. 승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멍하니 벽지 무늬를 헤아리면서 토도마츠는 자신이 지금 하는 생각이 일절 쓸모없으며 오히려 기분 나쁜 감정으로 자신을 좀먹을 것을 알면서도 그만둘 수 없었다.
아직 졸업도 하지 않은 학생인 저와 이제 완연한 사회인이 된 카라마츠. 시간도, 장소도, 화제도 전혀 겹치지 않는 두 명의 개인. 그렇다면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더 희생하고 있는 쪽은 누구일까? 과연 누가 먼저 지치게 될까?
아아. 무의미한 침음을 내뱉으며 토도마츠는 이 관계가 언제까지고 이어질 수 없으리라 예감했다.
* * *
“왜 피하는 거지?”
강의가 끝나고 발걸음을 서두르는 토도마츠의 앞을 카라마츠가 막아섰다.
“피하는 거 아니야. 바쁘니까 비켜줄래.”
“연락도 안 받고 자꾸 도망치기만 하잖아. 너 이런 적 없었어.”
토도마츠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간혹 카라마츠의 직관은 순수한 매가 되어 토도마츠를 질책하는 것 같았다.
“...나는 너완 다르게 섬세하지 못한 사람이라서 말해주지 않으면 잘 몰라. 하지만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상관없이 너를 존중해줄 거야.”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부담스러웠다.
카라마츠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마 토도마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토도마츠는 이 침묵을 극복해야할 필요성에 대해 생각했다. 할 말을 한참동안 고르고 걸러내다보니 머릿속에 부유하는 것이 얼마 없었다. 그때 단 하나 확실했던 것은 카라마츠의 말이 실로 진심이라는 것이었다. 토도마츠는 카라마츠처럼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행동으로 표출하기로 했다. 와락 카라마츠를 껴안았다. 넓은 어깨에 고개를 묻고 단지 그러했다.
“형. 나랑 약속해줘.”
“응.”
“우리는 단지 수지가 맞아서 함께할 뿐인 거야. 언젠간 서로에게 더 필요한 사람이 나타나겠지. 그때는 가차 없이 우리를 버려.”
“알았어.”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사랑하자. 카라마츠는 토도마츠의 어깨를 그저 힘주어 감싸 안았다. 마치 그곳에 존재하는 두 사람을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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