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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라비] 해의 그림자














1.


워커 남작이 죽었다. 사인은 불명이었다. 단지 며칠 밤을 시름시름 앓다가 자는 듯이 숨을 끊었다. 내로라하는 의원의 처방에도 손쓸 도리가 없었다. 숱한 괴문이 떠돌았으나 그중 어느 것도 그의 죽음을 설명하진 못했다. 그저 남작이 남긴 것은 오래된 저택과 몰락귀족의 많지 않은 재산이었다. 그렇게 어린 알렌은 혼자가 되었다. 한때 남작이었던 것이 담긴 함을 물끄러미 들고서.



남작은 혼인을 하지 않았고 물론 후대도 남기지 않았으므로 알렌은 워커였지만 혈연은 아니었다. 따라서 남작의 작위 역시 물려받을 수 없었다. 작게 장례를 치르고 나면 이제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고작해야 슬퍼할 뿐인 열다섯 소년은 그날 처음으로 자신의 무능함에 개탄했다. 





2.


주인 잃은 저택에 방문객이 찾아온 건 남작의 죽음으로부터 열흘이 지난 후였다. 남작의 침상에 시체같이 웅크리고 있던 알렌이 낯선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여러 명의 발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확인코자 상체를 일으켰다. 그 순간 땅이 일렁이고 몸과 머리가 따로 움직이는 것처럼 잠깐 사지가 휘청거렸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은 상태였으므로 당연했다. 알렌은 비틀비틀 걸어가 방문을 열었다. 분명 텅 비어있어야 할 복도에 처음 보는 사내들이 우글우글했다. 조각상이며 액자 따위의 물건들이 바깥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았지만 그가 그 상황을 똑바르게 인지할 정신이 있을 리 없었다. 




“아, 그건 버려줘. 쓸모없이 짐만 될 테니.”




무리들 가운데서 지휘를 하고 있던 한 남자가 복도의 청동트로피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제야 알렌은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잠깐만요. 가라앉은 목소리에 조금 힘을 주어 불러 세웠다. 남자가 들은 체도 하지 않자 성큼성큼 다가가 어깨를 붙잡았다. 손아귀의 힘은 형편없었으나 무신경한 남자를 뒤돌아보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누굽니까, 당신.”


“아, 네가 알렌 워커야?”


“…당신이 뭔데 버리라 마라 하냐구요.”




지금 부리는 것이 괜한 오기임을 알면서 알렌은 매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이런다고 꼼짝하지 않을 거란 걸 감지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시선 한 번 흔들리지 않은 남자는 알렌의 손을 툭 쳐내더니 씨익 웃었다. 그린 듯이 형식적인 미소였다. 알렌으로선 그것이 더 불쾌할 따름이었다.




“넌 이제 우리 집에서 살게 될 거야. 이 구린 저택이 아니라.”




난 네 새로운 보호자거든. 그리고 하는 말은 전혀 살갑지 않았으므로 더욱 수상쩍었다. 무어라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끊임없이 버려지는 것으로 분류되는 저택의 물건들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어 알렌은 짐꾼들 앞에 두 팔 벌려 막아섰다. 그러나 약해진 몸에 다소 무리한 움직임이었던지 금방 하체가 풀려 비틀거렸다. 복도 바닥에 고꾸라지려는 순간 남자의 손에 붙잡혔다. 제 의지가 아닌 채로 남자에게 기대며 알렌은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초점을 맞추기 위해 눈을 찡그렸다. 그래도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들리는 괜찮냐는 목소리. 사무치는 감정에 알렌은 아랫입술을 잘근 물었다.




“…아무것도, 버릴 수 없어요. 소중한 거니까….”




이마 위에 서늘한 손바닥이 닿는 것을 느끼면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3.


눈을 떴을 때 알렌은 처음 보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고급스러운 녹색 실크 이불이 덮어져 있었고 이마 위엔 젖은 수건이 올려져 있었다. 캐노피가 창문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살랑거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잠에 들었다. 그 다음 일어난 것은 새벽녘이었다. 알렌이 깨어난 것을 본 나이 든 하녀가 따뜻한 양송이 수프를 내어왔다. 무감하게 수저를 들면 워커 저택에서의 나날이 뇌리에 떠올랐다. 눈물이 뺨을 적시기 전에 재빨리 소매로 쓱쓱 닦아냈다. 더는 약해져선 안 돼.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서, 알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알렌은 금세 한 접시를 비워냈다. 어느 새 남자는 문턱 앞에 서서 팔짱을 끼고 알렌을 빤히 구경하고 있었다. 




“생각만큼 나약하진 않구나.”


“…….”


“때론 살아남는 것도 용감한 일이지.”




남자는 자신의 이름이 라비이며 이것은 절대로 가명이지만 그냥 그렇게 부르라고 말했다. 그의 붉은 머리와 오른쪽 눈에 찬 안대는 단정치 못한 인상을 줬기 때문에 알렌은 라비가 스스로를 성직자라고 소개하기 전까지 그 사실을 유추할 수 없었다. 



알렌은 조심스러웠고 한참을 뜸 들였다. 라비가 무언가 궁금한 것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야 말문을 텄다.




“…왜 절 데려온 거죠?”


“워커 남작과 약속했거든.”


“어떤 약속인가요.”


“그건 비밀.”




능청스럽게 대답하고 있으나 전부 질문의 요지를 비끼고 있었다. 그에 알렌은 라비가 퍽이나 귀찮은 부류의 사람임을 깨달았다. 서글서글하게 굴고 호의를 보이지만 속을 알 수 없어 수상했다. 지금 당장은 도움을 줄지 몰라도 혹시 나중에는 어쩔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잔뜩 가시를 세운 경계심이 얼굴에 드러났던 모양이다. 라비가 돌연 파하하 웃으며 알렌의 머리에 손을 얹고 마구 흩뜨렸다. 머리칼이 엉망이 되어 알렌은 떨떠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본 라비의 얼굴은 저번보단 제법 사람 같은 미소였다.




“워커란 라스트네임은 계속 쓰게 해줄게. 하지만 내가 널 워커라고 부를 일은 없을 거야, 알렌.”





4.


라비의 저택은 워커 가문의 것에 견줄 수 없을 만큼 넓었다. 천장은 높았고 끊임없이 청소되는 벽지와 바닥은 광택이 났으며 길게 난 창문으로 찬연하게 햇살이 들어 어디든 밝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알렌은 그곳에 금방 적응했다. 



물론 딱히 그곳을 집이라 느낀 건 아니었다. 그저 몸을 위탁하는 장소로써 최적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라비는 권세를 부릴 줄 아는 자였고 교활한 만큼 현명했으며 그건 알렌에게 나쁠 것이 없었다. 덕분에 학업이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라비의 후원은 생각보다도 알렌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여전히 그는 못미더운 남자였지만, 그 사실마저 부정은 못했다.



한편 라비는 알렌에게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 굳이 교류를 하려 들지도 않았고 학교에서의 생활에 대해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라비와 마주치는 건 식사 때에 아주 잠깐. 그마저도 드물었다. 워낙 그의 생활습관이 불규칙해서 그랬다. 오죽하면 하녀들이 라비가 끼니를 너무 자주 거르는 것이 고민이라고 털어놓았다. 알렌은 그가 끼니를 거르면서까지 무얼 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적어도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궁금했다. 그의 권력의 원천과 부유함의 출처, 그리고 워커 남작과의 관계. 뭐 그런 것들. 





5.


“오늘 저녁 버킹엄 성당에서 축일 미사가 진행될 예정이야.”




라비가 말을 먼저 건 것은 이 저택에 온 첫날 이후로 참으로 간만이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라는 게 생뚱맞기 그지없어서 알렌은 다소 의아했다. 식탁에 마주 앉은 라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대로 된 부가설명을 요하는 그 눈빛에 라비는 스테이크를 자르면서 조금 더 말했다.




“너도 가자.”


“제가 왜요?”


“할배가 널 데려오래. 보고 싶다고.”




그가 지칭하는 자가 누구인지는 모를 노릇이었으나 적어도 무척 성가신 일임에는 분명했다. 그보다도 알렌이 탐탁찮게 여긴 것은 그러한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통보의 무례함이었다. 애초에 단 둘이 나들이를 나갈 만큼 긴밀한 관계도 아니거니와 불쾌함을 느끼고도 순순히 그 말을 들어줄 정도로 알렌은 호락호락한 성격이 못 됐다. 싫어요. 앳되지만 단호한 거절의 목소리에 무신경했던 라비도 시선을 들어 알렌을 마주보았다.




“저는 신 안 믿습니다. 사람들의 무분별한 종교적 믿음도 이해 못하겠고요. 그런 건 시간낭비예요.”




알렌은 라비가 성직자이며 하루에 세 번 성당의 종소리에 맞추어 삼종기도를 올리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대놓고 그의 신앙을 경시한 것이다. 그 발칙한 도발에 기분 나쁜 티라도 낼 줄 알았던 라비는 그저 눈을 꿈뻑꿈뻑하다가 배시시 웃었다. 알렌이 경험한 바 라비는 원체 잘 웃는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웃음으로 모든 걸 무마하는 요령 없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거 알아, 알렌? 당황하는 사이 라비가 말했다.




“너는 멍청하다고 생각해도 다수가 옳다고 여긴다면 그건 분명 가치 있는 거야.”


“…하지만 저는 스스로 바보가 되는 길은 걷고 싶지 않아요.”




저택의 하녀들이 빈 접시를 치우고 후식을 내어왔다. 알렌의 앞에는 다즐링 홍차가 놓이고 라비의 앞에는 소테른 와인이 놓였다. 라비는 와인이 담긴 유리잔을 살짝 흔들었다. 투명한 화이트와인이 잔물결을 일으키며 섞이면 향이 조금 더 깊어졌다. 




“종교는 맹목적이고 우매한 것이지만 그걸 이용할 줄 아는 자에겐 기막힌 무기가 될 수 있거든.”


“당신 성직자 맞아요?”


“같이 미사 보러 가자. 맛있는 거 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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