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부쩍 다가왔다. 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냈고 단복은 조금 더 두꺼워졌다. 교단은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며 이듬해를 준비했다. 11월의 네 번째 목요일은 그것을 위한 시기였다.
모두가 잠시 임무를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는 추수감사절에 가장 바쁜 사람은 주방장인 제리였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일손이 턱 없이 모자라. 제리가 울상 지었다. 평소 제리와 친밀한 리나리가 옆에서 그녀를 거들기 시작하면 그날의 아침 식탁은 일사천리로 채워졌다. 훈제 연어와 양 갈비살, 베이컨과 로스트비프, 소시지, 으깬 감자, 민스 파이, 바나나 크림, 그리고 요크셔 푸딩이 차례로 나왔고 메인디쉬인 구운 칠면조 요리는 단원 전원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 푸짐했다.
그러고 보니 알렌은 교단에서 처음 맞는 추수감사절이겠네! 검은 브이넥을 입은 라비가 쾌활하게 말했다. 기실, 아침까지만 해도 알렌은 오늘이 추수감사절이라는 걸 한참 까먹고 있었다. 입단하기 전에는 일절 챙겨본 적 없는 명절인데다가 아인트호벤에서의 임무를 끝마치고 온 것이 바로 어제였으니까, 어쩐지 예기치 못한 선물을 받은 느낌이라 조금은 상기된 기분이었다.
“소감은?”
“즐거워요.”
“저녁 식사 때는 더 즐거울 거야.”
라비는 작년 추수감사절에 있었던, 코무이와 칸다, 그리고 당밀 타르트에 얽힌 자그마한 트러블을 얘기해주었다. 그 일화를 말하는 라비의 얼굴이 무척 즐거워보여서 알렌은 새삼 자신이 교단에 들어온 것이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작년 이맘 때 그는 크로스와 동행하고 있었고 그동안 어디 한군데 정착하지 않는 국가단위의 유랑생활을 거듭해왔다. 불현듯이 시간의 덧없음을 인식한 것은 그때였다. 분명 쉬지 않고 달려온 길이었는데, 뒤돌아보니 제자리인 것 같았다. 동시에 라비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지 양손을 머리 뒤로 깍지 끼며 한숨 쉬었다.
“아아, 벌써 겨울이라니. 봄은 또 언제 오려나.”
“글쎄요. 천년백작을 무찌르고 세계에 평화가 찾아오는 날?”
“마법 같은 소리.”
옆에서 피식 바람 새는 웃음소리가 났다. 알렌은 고개 들어 청명한 가을하늘을 빤히 우러르다가 앙상한 나무로 시선을 돌렸고 다시 라비를 바라보았다. 라비는 눈이 마주치자 예의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보답하고자 알렌은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부딪혀 딱 소리를 냈다. 빈손에서 돌연 장미꽃 한 송이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시들시들 메말라버린 정원 가운데 선명한 빛깔의 맵시 고운 장미꽃은 단연 돋보였다. 알렌은 그것을 라비에게 건네며 한결 부드러운 얼굴을 했다.
“마법은 부릴 줄 모르지만 마술의 눈속임정돈 할 수 있어요.”
멋진 걸. 생경한 묘기에 라비는 작게 감탄하며 받아들었다.
“여자들한테 인기 많겠다, 알렌.”
“상관없어요, 그런 거!”
라비가 짓궂게 배시시 웃으면 알렌 역시 질렸다는 듯 대꾸하면서도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때마침 성당에서 오후미사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검거나 하얀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하늘을 가로지르고 교단은 한층 더 조용해졌다. “라비는 미사에 참석하지 않는 모양이네요.” 이번에는 알렌이 먼저 말을 꺼냈다. 라비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런다. “너야말로.” 그들은 기도를 올리는 대신 그 근처의 정원을 서성이거나 들려오는 성가의 음조를 흥얼거리면서 시간을 죽였다.
“저는 사실 한 번도 미사를 본 적이 없거든요.”
신의 사도라지만 사실상 종교인이 아니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쪽이 차라리 더 좋았다. 라비도 그에 공감했다. 그저 제리의 요리 실력을 칭찬하며 오늘 저녁식사에서 나올 메뉴에 대해 간간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가만 고즈넉함을 즐겼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선 것은 라비였다. 자신은 기록해야할 걸 마저 정리해야겠다며 이따 저녁에 다시 보자는 인사말을 했다.
“참, 알렌. 팍스테쿰이란 말 알아?”
그때 그가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뒤돌아 그리 물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알렌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가톨릭에선 보통 이 말을 인사 대신에 쓴대.”
“무슨 뜻인데요?”
“평화가 당신과 함께.”
그와 동시에 라비가 무언가를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제게로 날아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잡아 확인하건대 손가락 마디의 반만한 초콜릿이었다. 변변치 않지만 재밌는 걸 보여준 보답으로 받아둬. 활짝 웃고 다시 돌아서는 그 뒷모습을 알렌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초콜릿의 포장을 풀어 입에 넣으면 쌉싸름한 단맛이 입안에 퍼졌다.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까보았던 구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디그 전력 60분 참여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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