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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라비] ash like snow













비참하다. 라비는 그렇게 생각했다. 창문 밖에선 여전히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낡아빠진 창틀이 너덜거리며 자꾸 소음을 만들어냈다. 폭설을 해치고 온 그는 양 뺨과 두 손이 발갛게 부었지만 속으로는 무엇보다도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비참하다. 끊임없이 생각했다.







*   *   *







교단의 로비에 죽은 자들을 위한 진혼가가 울려 퍼졌다. 검은 성가대 단복을 입은 무리가 2열로 중앙에 서면, 사람들은 일제히 정면을 향해 고개 숙이고 묵도를 올렸다. 부디 사자의 넋은 성히 당신 곁에 닿게 하며 생자는 악마에 지지 않도록 굽어 살피시라고. 그럼에도 그 순간 엑소시스트들의 고개는 빳빳했다. 혹자는 신의 비호를 받는 자다운 오만함이라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들은 그저 희생자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 둘 뿐이었다. 곧 뜨거운 불길에 휩싸여 형상조차 남지 않고 차디찬 재가 될 전우의 마지막 모습을.



칸다 유우는 자리를 떠났고 리나리 리는 울음을 터뜨렸다. 알렌 워커 역시 지금 이곳에 있었다면 그녀처럼 눈물을 보였을지 몰랐다. 그는 공감능력이 뛰어난 편이었고 남 일을 제 것인 양 생각했다. 그 비정상적인 이타심은 오히려 종종 그를 수렁으로 몰았는데, 일전의 전투에서도 악마에게 표적이 된 파인더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던 것이다. 라비는 바로 눈앞에서 그 장면을 목격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악마의 탄환에 온몸이 관통당하고도 알렌은 꿋꿋이 왼팔을 휘둘렀고 끝내 파인더를 구했지만 동시에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후퇴지시가 내려온 그 순간 라비가 한 판단은 정신을 잃은 알렌을 들쳐 매고 도망치는 일이었다. 일방적인 전투였고, 참혹한 패배였다.




방으로 들어가라, 라비. 몸이 성치 않구나.




비참한 생각의 연쇄를 끊은 것은 북맨이었다. 그는 독심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라비가 이토록 비참함에 사로잡혀 있을 때면 언제나 의식을 환기시켜 주곤 했다. 라비가 시선을 내려 북맨을 바라보았다. 표정변화 없는 평범한 노인의 얼굴이었지만 함께한 시간이 긴 만큼 읽혀지는 것이 있었다. 절대 소속되지 마라. 북맨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 라비는 매번 같은 답을 돌려주어야만 한다. 알겠어, 영감. 하고.



수백의 시체가 늘어져 있는 로비를 절뚝거리며 가로질렀다. 그는 누구보다도 그 한복판에 있었지만 성가대의 노랫말도 살아남은 자들의 울음소리도 그저 먼 곳의 것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스치듯 지나간 시체의 명표에서 알렌이 지키고자 했던 파인더의 것을 본 것 같았다. 라비는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걸음을 빠르게 했다.



알렌이 눈을 뜬 것은 그 날 새벽이었다. 일어나자마자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파악하는 그에게 라비는 읽던 책을 덮고 네가 사흘을 내리 잠들어있었노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동그란 눈을 더 휘둥그레 떴다. 사흘씩이나요?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에 다소 좌절감이 묻어났다.




…로먼 씨는요?




그리고 이어진 물음. 라비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까 스치듯 본 이름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알렌에게 대답을 들려주기 싫었기 때문인지는 불분명했다. 그러나 알렌은 이미 그 망설임에서 무언가를 도출한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창백해졌다. 절망스런 눈이 순간적으로 물기를 가득 담았다가 이내 퍽 찡그러졌다. 알렌이 고개를 떨구고 젠장, 나지막이 씹어뱉었다. 링거가 덕지덕지 꽂힌 주먹을 파르르 떨며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뚝뚝 눈물을 흘렸다. 그 순간,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도망친 자는 할 말이 없었다. 라비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대로 그 괴로움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차라리 화를 내주면. 왜 그때 그를 구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느냐고 윽박질러주면 좋았을 텐데, 소년은 그러지를 않았다. 오히려 제 나약함을 탓하며 스스로를 가혹하게 채질했다. 알렌의 그러한 외곬적인 성실성은 간혹 순수한 매가 되어 라비를 질책하는 것 같았다.




“그 애는 라비가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대.”




그러니까, 지금처럼.



식당에서 마주친 리나리는 식판을 들고 자연스럽게 라비의 옆에 착석하더니 곧 그런 말을 했다. 숟가락 위의 감자수프가 후두둑 떨어졌다. 라비가 이해불능한 표정으로 굳어있자 리나리는 흘끔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아직 패배의 절망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느 단원들과 같이 그녀 역시 비교적 힘없는 목소리였다.




“알렌 말로는 전투에서 돌아온 이후 네가 자꾸 자기를 피하는 것 같다고 하던걸.”




하면서 연하게 웃는다. 이보다 더 불편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며 라비는 어색한 미소로 대꾸했다. 확실히 요사이 알렌을 피해 다닌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들어올 줄은 라비로선 예상 외였다. 허례허식을 못하고 직관적인 타입의 알렌은 종종 이런 식으로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럴 때면 화술이 좋고 처세에 능한 라비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라비도 상심이 크겠지만… 언제라도 한번 알렌에게 찾아가줬으면 해.”


“…….”


“둘이 예전처럼 같이 있는 모습, 지금 다들 보고 싶어 하니까.”




리나리는 웃고 있었지만 물론 그 모양새만큼 해맑은 미소는 아니었다. 그에 라비는 한결 거북해진 기분으로 퍽퍽한 옥수수빵을 우물우물 씹었다.







*   *   * 







“아, 라비.”




눈이 마주치자 알렌이 웃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얼마 전 입었던 부상은 제법 치유되어 얼굴에 남은 잔흉터와 아직 깁스를 풀지 않은 왼팔을 제외하면 멀끔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라비도 마주 인사해주었다. 마음의 불편함은 살짝 숨겨둔 채.




“할 말이 있으면 직접 하지, 리나리한테 말하기는. 너답지 않게.”


“미안해요. 최근 라비 분위기가 어쩐지 다가가기 어려워서.”




거리가 좁혀지자 알렌이 품에 든 한 다발의 꽃이 보였다. 노란 줄기에 순백색 풍성한 잎을 가진 꽃이었다. 리시안셔스. 라비가 혼잣말하듯 그 이름을 읊자 알렌이 감탄했다. 역시 모르는 게 없네요.




“…로먼 씨가, 자기가 죽으면 이 꽃을 놓아달라고 했거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라비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잘근잘근 아랫입술을 깨물게 되었고 자꾸만 식은땀이 났다. 며칠간의 폭설로 눈 쌓인 길을 지나면서 알렌은 발개진 코끝으로 라비에게 로먼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리시안셔스의 향기를 사랑하는 로먼의 약혼녀와 그의 아름다운 고향땅, 평소 그가 자신을 친동생처럼 어여삐 여겼다는 사실에서부터 마지막 전투에 임했던 각오까지. 알렌이 의식하지 않고 내뱉는 일련의 말들은 보이지 않는 언어의 사슬이 되어 더욱 라비를 무겁게 짓눌렀다. 발밑으로 가지를 뻗어나가는 메마른 사색 속에서 끝이 없는 허방이 느껴졌다. 그는 계속해서 가라앉았으며, 절망했고, 범람하는 무량한 비관을 느꼈다.



여섯시가 되자 성당에서 만종이 울렸다. 삼종기도의 마지막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에 호응하듯 해는 어느덧 저물어 뉘엿뉘엿하며 온 곳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알렌은 한때 로먼이었던 것이 묻힌 땅 위에 갈무리된 꽃다발을 내려놓고 눈을 감아 기도했다. 그의 무덤 앞에 가까이 설 수 없는 탓에 라비는 한걸음 떨어져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혹시 꽃말이 뭔지도 알고 있습니까?”


“…영원을 위하여.(For eternity.)”


“잘 어울리는군요.”




노을을 등지고 웃으면 그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부조되었다. 라비는 결국 그를 마주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무언가가 라비를 야금야금 좀먹고 있었다. 알렌은 성호를 마저 긋고 금방 이야기의 본론을 꺼내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거든요. 무모하게 폭발에 뛰어드려는 저를 리나리가 구해줬는데, 우습게도 왜 절 말렸느냐고 리나리에게 화를 냈어요. 그런데 그때 리나리가 어쨌는 줄 아세요? 제 얼굴에 주먹을 꽂고 그렇게 말했어요. 동료니까, 라고. 그러니까, 그때의 저는 눈앞의 것밖에 볼 수 없었던 거예요. 눈앞의 것을 지키기에 급급해서 보이지 않는 것에 소홀했던 거죠. 결국 그런 성급함은 둘 다 잃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고 마는데도….”




알렌의 목소리는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소년의 것이라 듣기에 부담이 없었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말들은 그의 성정처럼 상냥했고 라비를 충분히 배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나친 상냥함은 때때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다. 알렌은 그걸 몰랐다.



한편 라비는 무의식적으로 그날의 알렌을 떠올리고 있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맹렬한 기세로 악마와 대치하며 기꺼이 제 왼팔을 희생했던, 남자의 부고를 듣고 무너질 듯이 절망스러운 얼굴을 했던 알렌. 알렌의―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때 절 구해줘서 고마워요, 라비.”




그 표정을 보면, 누구라도 자괴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리가.



라비는 숨을 오래 멈추었다. 그러다가 크게 들이쉬었다. 뿌연 입김이 나타났고 흩어졌다. 노을은 이미 다 지고 완연한 저녁이었다. 가는 눈발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하늘 떨어지는 그것은 머리카락 끝에 가녀리게 매달리거나 신체의 상단에 달라붙었다.



알렌이 제 목숨 바쳐 살리고자 했던 그 파인더를, 마치 꼭 그를 버리고 도망치기를 택한 듯이 스스로가 비겁하게 느껴졌다. 알렌의 거룩한 희생을 무용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선택은 언제나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그때의 선택 또한 마찬가지였노라고 합리화하기엔 라비는 이미 너무나도 작아져 있었다. 그저 자리를 지키기만 하는 알량한 사명감으로는 그 무엇도 구할 수 없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순간마다 알렌이 있었다. 겉보기와 다르게 그는 치열한 사람이었다. 끊임없이 벽을 넘기 위해 분투했고, 실제로 넘어섰으며, 그렇게 헌신했으니까. 




“…눈 온다. 그만 들어가자.”




그토록 치열한 알렌 옆에 설 때면 라비는 생각했다.

비참하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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