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그쪽, 내 얼굴 몰라요?”
임무를 끝마치고 돌아가는 열차 안이었다. 통로 저 끝에서부터 성큼성큼 걸어온 한 행인이 노골적으로 라비를 콕 집어 그리 물었다. 탁한 금발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의아한 상황에 알렌은 먼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무료한 눈으로 차창너머를 흘기듯 바라보던 라비의 표정이 환해진 건 바로 그때였다.
“로베르트 아냐?”
“역시 맞았지, 준!”
반가운 조우인지 그들은 금세 화기애애해졌다. 복도에 서있던 남자가 자연스레 라비의 옆 빈 좌석에 착석하고, 본격적으로 그에게 어디를 가는 길이며 어디서 오는 것인지 물었다. 라비는 여타 장설은 제쳐두고 그냥 현재의 기록을 위한 출장이라 답했다. 남자가 작은 소리로 탄복했다. 여전하구나, 북맨 일족은. 그게 약간 석연치 않은 눈빛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쪽의 동행자는 누구시지?”
“알렌이라고, 지금 같이 일하는 녀석.”
“아, 안녕하세요….”
일견에도 남자는 라비와 동류라서 지나치게 살가운 부분이 있었다. 그 갑작스러운 시선에 알렌은 멍하니 있다가 남자가 내미는 손을 뒤늦게 마주잡았다.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는 얼굴이 제법 연상의 너그러운 느낌을 풍겼다. 추측하건대 라비와 동갑, 혹은 두어 살 위 정도. 남자는 자신의 이름이 로베르트이고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지도 그리는 일을 한다고 말했다. 알렌 역시 가볍게 몇 마디의 자기소개를 해주었다. 이윽고 두 사람만의 얘기가 한참 길어질 것 같아서 잠시 자리를 비켜주기로 한다. 로베르트는 고맙다는 눈짓을 했다.
알렌이 라비를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었다. 교단에 들어오고도 석 달. 애초에 끊임없이 임무가 주어지는 엑소시스트란 웬만해선 계속 엇갈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훗날 라비에게 듣기를 그는 알렌의 입단 소식을 미리 듣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찾아온 거라고 했다. 자기의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고. 무엇을요? 그렇게 묻는 물음에는 그저 생글생글 웃으며 글쎄, 하고 회피할 뿐이었다. 하기야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그게 수상했어도 알렌은 그런 점이 딱히 꺼림칙하다고 느꼈던 적은 없었다. 새삼스러운 건, 이제 와서 궁금증을 갖는 본인이었다.
“그때, 로베르트란 분께서 라비를 준이라고 부르던데.”
해물파스타의 면을 포크로 돌돌 말며 알렌이 넌지시 물었다. 생각해보면 라비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고작해야 초월적인 기억력이라든지 북맨의 후계자라는 것쯤일 테지만, 이는 알렌뿐만 아니라 라비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지니는 가시적 사실에 불과했다. 라비는 아직 잠이 덜 깬 듯 졸린 눈을 하고 빵을 오래도록 우물우물 씹었다. 음식물을 다 삼키고 나서야 대답을 하는 목소리에 더없이 무성의함이 풍겼다.
“뭐, 내 예전 이름 중 하나야.”
“그럼 준 말고 또 있어요?”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해?”
직구로 날아오는 반문에 그다지 할 말이 없었다. 알렌은 무감하게 포크로 접시를 두드리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무래도 그럴싸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요, 궁금하니까? 그러자 라비가 키득키득 웃더니 손가락 끝으로 알렌의 이마를 가벼이 톡톡 건드리는 거였다. 아프진 않은데, 그가 상대를 놀려먹거나 어린애 취급 할 때 주로 하는 버릇이었으니까 기분은 충분히 상했다. 불만스러운 눈을 치켜뜬 채 알렌은 라비가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보았다.
“나도 말 안 해줄래. 그냥.”
그 말에 처음으로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분함을 느꼈다. 안쪽 언저리에서 헛돌고 있던 무언가가 불쾌함임을 깨달은 것 역시 그때였다.
* * *
로베르트는 그로부터 머지않은 날에 다시 볼 수 있었다. 최근 북해의 이상 징후로 파견된 함부르크에서 로베르트는 먼저 도착하여 알렌을 환영하고 있었다. 여유롭게 손 흔들어 보이는 그 번한 얼굴에 알렌은 놀라다 못해 다소 황당했다. 그는 게르만의 구전설화로만 전해지던 움직이는 섬이 북해에 나타났다는 얘기를 듣고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찾아왔다고 간단히 설명했다. 이유는 달랐으나 어쨌거나 목적은 같은 셈이었다. 그래서 당분간 협력하기로 했다. 로베르트는 앞서 조사한 독일 북부 지역의 여러 가지 풍문들을 들려주었고 그것은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좌우간 그가 그런 식으로 워낙에 곰살맞게 굴었으니까, 알렌은 처음 보는 상대를 대하면서도 자꾸 익숙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로베르트 씨는 꼭 라비랑 닮으셨네요.”
그래서 결국 무의식중에 생각하고 있던 것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오고야 말았다. 내뱉고 나서야 아차 싶어 서둘러 그의 눈치를 보았지만 그는 그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을 뿐이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뒤늦게 구구절절 변명을 덧붙였다. 그게, 친한 친구는 서로 닮는다고 하잖아요. 물론 나쁜 의미는 아니구요. 당연히 로베르트 씨가 훨씬 더 어른스럽고… 사실 라비는 약간 애 같은 부분이 있으니까. 아니, 제 말 뜻은…. 스스로 하는 말에 도리어 혼란에 빠져 횡설수설 하는데 가만 듣고 있던 로베르트가 돌연 크게 너털웃음 지었다.
“그래, 라비…. 그게 준의 지금 이름이구나.”
웃음을 진정시키고 난 그는 자켓 안쪽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피워도 괜찮겠냐는 물음에 알렌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이윽고 불을 붙이자 담배 끝이 동그랗게 타올랐다가 까맣게 그을리며 연기가 피었다. 할 말이 없어진 알렌은 그가 어떤 말이라도 해서 정적을 깨주기를 기다렸다. 어색함이 사무쳐 괜히 목덜미를 매만지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로베르트가 알렌의 기대에 부응해준 것은 담배가 손가락 마디 반만큼 작아졌을 때서였다.
“알렌은 준이랑 만난 지 얼마나 됐어?”
“두 달이요.”
“오래됐네.”
로베르트는 담배를 마지막으로 깊이 빨아들이고 땅에 버렸다. 그리곤 발로 비벼 끄면서 알렌을 빤히 쳐다보았다. 부드러운 인상이었지만 그때 마주본 얼굴은 어쩐지 서늘한 분위기였다. 알렌은 그제야 그에게서 받았던 기묘한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웃는 낯이었음에도 속이 비어 공허했다. 그것이 닮았다.
“나는 4년 전에 처음 만났어. 너만큼 길게 함께하진 않았지만 워낙 인상 깊은 사람들이었으니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 어느 날 불시에 나타나 마을 아이들에게 여러 노랫말과 고전을 들려주곤 했거든. 특히 준의 여행담은 굉장했지. 언젠가 부모님의 허락을 받으면 그들처럼 세계를 유랑해보고 싶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마을은 멸족 당했고, 그들은 홀연히 떠나버렸지만. 부활절에 리히터 언덕에서 만나자는 약속도 안 지키고 말야.”
사실 그땐 조금 슬펐어. 덤덤하게 그 말을 하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차분해 있었다. 알렌은 그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몰랐으나 의도는 충분히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약간 혼란스러워졌다. 해가 지고 있는 항구는 몹시 조용했고 유난히 인적 드물었다. 슬슬 저 멀리서 등대 불빛이 반짝 점멸하고 있었다. 뱃고동소리가 아스라이 울렸다.
“그 이후에 여행을 시작한 것도 사실 북맨과 준을 만나기 위해서야. 이렇게 곳곳을 돌아다니다보면 언젠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로베르트가 싱긋 웃었다. 노을을 등지고 있으니 그 웃음이 더욱 선명했다. 알렌은 그 모든 과정들을 얌전히 지켜보며 기다렸다. 그는 좋은 청자였기 때문에 보채거나 같잖은 첨언을 하지도 않았다. 그러면 로베르트는 부담스럽지 않은 어조로 마저 말을 이어나갔다. 뭐, 막상 만나고 나니까 딱히 할 말은 없더라.
“어쨌거나 그들을 너무 믿지 않는 게 좋아.”
“…….”
그렇게 말한 로베르트는 먼저 숙소로 돌아갔다. 숙제처럼 남겨진 말에 알렌은 한참동안 그 자리에 앉아 생각했다.
* * *
임무는 허무하게 끝났다. ‘움직이는 섬’ 전설의 실체는 단순한 바다 신기루로, 알렌과 로베르트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지 장장 사흘이 걸렸다. 동시에 피곤이 몰려온 두 사람은 털썩 주저앉았다. 그 꼴이 너무 한심하고 우스워서 서로 마주보면서 하하 웃어버렸다.
로베르트는 다음 여행길은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 쪽이 될 거라고 말하며 알렌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 그때는 맥주라도 한 잔 하자고 하는 바람에 술을 싫어하는 알렌이 질린 얼굴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곤 떠나면서 손끝으로 알렌의 이마를 가벼이 톡톡 두드렸다. 그 행동에 또 다시 기시감이 들어서 알렌은 그와 헤어지고도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 * *
“피곤할 텐데 이 시간에 안 자고 뭐해.”
교단에 돌아온 그날 밤은 유난히 잠에 들지 못했다. 한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방을 나왔다. 2층 테라스에서 밤공기를 쐬고 있을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옆구리에 제 팔뚝만한 두꺼운 책을 끼고 있는 라비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안 본지 제법 오래된 얼굴인데도 어쩐지 전혀 간만인 것 같지가 않았다. 이번 임무는 허탕이었다며? 벌써 소식을 들었는지 등을 아프지 않게 팡팡 치며 그런다. 그에 알렌은 쓰게 웃었다.
“로베르트 씨를 만났어요.”
그러자 라비가 잠깐 움찔했으나 눈에 띌 만큼은 아니었다. 금방 평소처럼 여유작작한 태도로 물었다.
“그 녀석이 뭐라던?”
알렌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라비의 멀쩡한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런 식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나타내질 않으니까, 그것이 괘씸해서 알렌도 그냥 하고 싶은 말을 거르지 않기로 했다.
“라비란 이름은 가명인 거예요?”
“엥.”
라비는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그 뜻을 파악하고 저번처럼 웃었다. 그게 계속 궁금했던 거야? 알렌은 크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는 원체 솔직하고 허식을 하지 못하는 성정이었으므로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라비는 습관대로 알렌의 이마를 두드리거나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리지는 않았다. 그 대신 조금 더 묘한 웃음을 지으며 테라스 난간에 팔을 기대었다.
“이름은 단지 수단일 뿐, 내 자체는 못 돼. 그러니까 가명도 진명도 아니지.”
“로베르트 씨가 라비를 너무 믿지 않는 게 좋대요.”
“그럼 앞으로 어쩌게?”
순간, 모든 것이 침묵했다. 입을 다물고 그저 라비를 응시했다. 그는 마치 오늘의 저녁식사 메뉴를 묻는 것처럼 심상하고 예의 살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건 진짜일까, 아니면……. 그곳에 있는 그의 존재를 새삼스레 다시 인식하며 알렌은 이 침묵을 극복해야할 필요성에 대해 가만 생각했다. 그때 머릿속에 부유하는 것 중 온전한 문장인 것은 얼마 없었으나 불현듯 절로 입안에 맴도는 말이 있어, 뱉어냄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냥 제가 한 선택을 믿기로 했어요.”
그 대답에 라비의 얼굴에서 잠시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던한 정안. 그러다가 문득 표정을 풀었다. 그리곤 방심하고 있던 알렌의 머리통을 책으로 꾸욱 내리누르는 거였다. 그 기습에 알렌이 당황해서 상체를 푹 숙이면 머리 위에서 라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놀릴 때의 말투였다. 그래서 네가 고집불통이라는 거야. 그리 짓궂게 웃으면서 라비는 뒤돌아섰다. 책으로 눌린 부분을 매만지며 알렌은 그 뒷모습을 부루퉁 바라보다 언뜻 처음 로베르트를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서로를 반기고 묻던 안부. 끼어들 틈이 없었던 두 사람만의 대화. 그때 그들은 정말로 웃고 있었나, 하는. 솔직히 제삼자인 알렌에게는 별로 상관없는 사실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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