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Thanks Life >에서 이어집니다
가주를 잃은 워커 가문은 그의 양자인 알렌 워커를 새로운 수장으로 순조롭게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출신도, 핏줄도 밝혀진 바 없이 정치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스물의 청년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완벽히 가주의 모든 일을 수행했다. 신사업 재개 후 나폴리의 마피아 세력과 손을 잡은 그가 본격적으로 몰락 직전의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제일 먼저 떠올린 일은 유능한 지략가를 스카웃하는 것이었다고. 글쎄 말이 스카웃이지, 사실상 납치나 다름없다고 라비는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 집에 진짜 술은 없는 거야?”
“말하지 않았던가요? 주류 따윈 일절 두지 않습니다.”
긴 테이블에 알렌과 마주 앉은 라비가 내키지 않는 비프스테이크를 칼질했다. 천장의 샹들리에, 섬세한 무늬가 새겨진 촛대와 크리스털로 제작된 식기, 그리고 언제든 시중을 들 준비가 된 하인들.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식사자리에 있자니 입맛이 싹 달아나서 먹는 둥 마는 둥 하자 알렌이 한참 지켜보다가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이런 고급요리는 영 취향에 맞지 않는다며 실토하기엔 왠지 체면이 깎이는 지라 라비는 그냥 고개만 도리도리 내저었다.
짐승이 갑자기 사는 환경이 바뀌면 적응하지 못해 시름시름 앓는다고 하던가. 그건 비단 네발동물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라비는 이 저택에 온 이후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리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여러 가지 외부적 요인이 있겠으나 그가 생각하기엔 일단 방의 위치부터가 문제였다. 알렌이 라비에게 내어준 방은 저택의 최상층인 5층이었는데, 그것도 계단과 가장 먼 복도의 구석에 있었으며 계단을 이용하려거든 하인들이 거처하는 방을 지나야만 했다. 요컨대 평생을 어디 한군데 얽매이지 않고 살아온 라비에겐 거의 감금이나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온갖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기분은 그야말로 발끝부터 야금야금 갉아먹히는 듯했건만, 그리 지쳐가면서도 차마 도망치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는 알렌이 현재 자신을 지켜줄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수면위로 올라온 라비의 존재는 순식간에 정계와 재계를 통틀어 공공의 적이 되었고, 알렌이 보디가드를 빌미로 붙여준 마피아 장정들은 확실히 믿음직스러웠던 것이다.
마치 덫처럼 사방에서 조여들어오는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그저 간절했다. 본디 그는 삶에의 집념이 강한 부류인지라 신조니 절개니 하는 것들과는 평생 척을 지고 살아왔기에 태세를 전환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일단 정원사부터 고용해. 저택의 외관은 그 가문의 품격이니까.”
라비는 뭐 대단한 조언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는 저택 꼭대기에 갇혀 전혀 관리가 되지 않은 무성한 정원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없던 정신병이 걸릴 지경이었을 뿐이다. 워커저택은 크고 넓었으나 연식이 오래되어 으스스했고 오랜 부재로 텅 비어있던 데다가 알렌은 저택관리에 있어 믿을만한 최소한의 하인만을 두었으므로, 그는 바로 그 음산함을 견딜 수 없이 끔찍해했다. 그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알렌은 과연, 하고 작게 주억거렸다.
“그리고 또?”
“어디 갈 때마다 저 험상궂은 형씨들 대동하는 것도 그만하고. 무슨 조직폭력배 같잖아.”
“설마 도망치려고 잔꾀부리는 건 아니겠죠.”
“죽으려고 작정하지 않는 이상.”
이제 도망은 못 치지. 알렌은 뻔한 질문을 해놓고 라비의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만족스럽게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도 지독해서 진짜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고립시키고 발목을 베어서 스스로 체념하게 만드는 것. 그의 방식이었다.
* * *
최근 노아 가문의 자회사인 에버리스트를 복속시킨 알렌은 퍽 기분이 좋아보였다. 라비가 이사진 내 내분을 꿰뚫어 보았던 공이 컸기에 이번 건을 계기로 그를 완연히 믿게 된 모양이었다. 먹고 싶은 것이 있냐며 묻거나 대하는 말투와 행동 따위가 전보다 사근사근해졌다. 라비로선 썩 유쾌한 변화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화장실을 혼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맘에 들었다. 고작 기본적 사생활을 보장해주는 정도에 만족하는 스스로도 꽤나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끌려나오다시피 참석한 연회였다. 웬만한 저명인사들은 다 모인 자리니까 여기저기 죄짓고 다닌 그에겐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자도 있었고 대놓고 째려보는 자도 있었다. 어떤 이는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다가와서 악수를 청하는데 맞잡은 손에 경련이 일어날 만큼 무지막지하게 힘을 주는 거였다. 일순, 공포에 질렸다. 사실 라비는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적의가 익숙하지 않았다. 애당초 어딘가에 소속감을 가지지 않았으니 정보를 파는 행위에 있어 악심 또한 없었으며 그에겐 단순한 일련의 거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얼굴도 알지 못하는 불특정 다수로부터 증오를 받는다는 건, 상상보다도 버티기 힘들더랬다.
“다 때려 치고 튈까…….”
“안색이 안 좋은데. 고민거리라도 있어?”
고민? 그 물음을 듣고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라비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다. 반반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자신의 뒤로 가까이 붙어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구릿빛 피부, 그리고 맹수의 것과도 닮은 날카로운 금안. 시선이 마주쳤고, 핏기가 사악 가셨다.
“오랜만이네, 라비.”
―노아 가의 차남, 티키 믹이었다. 머리카락이 조금 자란 것을 제외하면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별반 다름없이 여전히 독특한 서늘함을 풍기는 미남이었다. 티키가 어깨에 친근하게 팔을 두르자 라비는 히익 놀라며 뿌리쳤다. 도망쳐야 한다. 제일 먼저 그리 생각함과 동시에 눈을 굴려 문의 위치를 확인했다. 일단 바깥으로 나가면 알렌과 그를 호위하는 마피아들이 있을 테지만 티키가 가로막고 서있어 정면 돌파는 무리였다. 티키는 거절당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 너, 어떻게……!”
“아, 오해는 마. 잡으러 온 건 아니고 우연히 만난 거야.”
너도 알다시피 나는 집안일에 손 뗀지 오래거든. 네가 우릴 배신하든 말든 나완 상관없는 일이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한 걸음 씩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위협적인 거리감이었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데 그만 벽타일에 등이 닿았다. 앞뒤로 꼼짝도 못하고 갇힌 꼴이었다.
물론, 우연히 만났다는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닐 것이다. 라비가 과거에 알았던 티키 믹은 천성이 자유롭고 방탕하여 마치 유수와도 같이 어디 머무르지 않았고 흥미 본위의 관심사가 명확했기에 가문의 일에도 무심했으며 그로 인해 가주의 골치를 썩이곤 했음을 모르지 않는 바였다. 귀족답지 않게 소탈한 면이라든지, 현재에 충실한 쾌락주의적 사고 따위가 저와 닮았다고 생각했으므로 대화도 제법 잘 통했다. 그래, 생각해보니 사이는 썩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라비가 겁내는 부분은 그의 사이코적인 면이었다. 위험한 변덕스러움과 비상식적인 잔학성. 그게 두 사람이 끝내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지 못한 까닭이다. 라비는 티키 믹이란 사내를 실로 두려워했으며 결코 가까워져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1년 전 그가 마침내 출가했을 때 한숨 돌렸던 것이다. 그 이후로 다시 볼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최악의 상황에.
그동안 티키는 가명으로 신분을 속인 채 지내고 있었다고 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조이드란 세 글자는 라비 또한 익히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림자 구역의 주민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정체불명의 후원자명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얼굴을 아는 이가 없어 소문만 무성했던 그가 바로 노아 가의 차남이라니, 경악스러움에 소름이 끼치면서도 새롭게 터득한 정보로 인해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본래 노아 가의 주 수입원은 마약밀매였다. 으레 그 사실을 아는 건 라비를 포함해서 몹시 소수였고, 손을 턴 지금은 금융업에 종사하고 있다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괴물 같은 속도의 성장력을 설명할 수 없었다. 수상한 점은 그 뿐이 아니었다. 그림자 구역의 존재를 알고도 단속하지 않는 정부, 구역 내에 유통되는 마약의 출처, 그리고 노아 가문과 정부가 이루고 있는 기묘한 동맹 형태. 지리멸렬하게 교호하던 의문들이 연결되어 정방향으로 조합되고 마침내 그 엇갈림 끝에서 라비는 한 줄기 빛처럼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국가와 노아 가문, 그림자 구역, 그 모두가 한통속이었던 거다.
“뭐,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그냥 보내주고 싶은데…….”
“…….”
“우리 큰형이 너를 애타게 찾고 있어서 말야.”
그리고 다시 현실을 맞닥뜨리고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셰릴, 그 작자였다. 전부터 저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그였으니만큼 얼마나 분노에 차 있을 지는 불 보듯 뻔했다. 창백해진 라비 앞에 티키는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은 얼굴로 잔혹한 말을 하나하나 늘어놓았다. 대면하고 싶지 않은 사실들을 굳이 상기시키는 행위는 그의 짓궂은 성정대로였다.
“널 붙잡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일단 움직일 수 없게 손발을 묶겠지…. 그리고 죽지 않을 만큼 팰 거야. 형은 자기 손을 더럽히는 걸 싫어하니까 대신 건장한 조폭을 시킬 지도 몰라. 여기저기 골절되고 피떡이 되면 시원하게 물고문을 하지 않을까? 머리채를 잡고 대야에 1분 간격으로 넣었다 뺐다 하고, 그 다음엔 쉴 틈 없이 곧장 손톱을 뽑아낼 테지. 피가 낭자해서 네가 찢어지게 지르는 비명에…….”
“…그만. 거기까지.”
라비는 더 이상 듣기 버거워 말을 잘라냈다. 노아 가문의 배신자로서 어떤 마지막을 맞이할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이 말을 하는 저의는 아마 겁을 주기 위함일 것이다. 연회장에는 알렌도 있으니 티키 역시 당장은 저를 해치지 못하겠으나, 이런 식으로 심리적 압박을 넣는 것은 그들의 익숙한 수법이었다. 라비가 슬금슬금 옆으로 피하자 티키는 가소롭다는 듯이 팔을 벽에 짚어 가두었다. 그림자가 얼굴에 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라비는 숨을 크게 들마시고 천천히 끊어 내뱉었다. 잠깐, 조금, 가깝지 않아? 그 말에 티키는 천연덕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성큼 다가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불편하게 했다. 거리감을 중요시여기는 라비에게는 더욱 더 그러했다. 티키는 고개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는가 싶더니 귓가에 입술을 비밀스럽게 대었다. 민감한 곳에 와닿는 숨결에 움찔하고 살짝 몸이 떨렸다. 공기 중에서 곧장 전해지는 낮은 울림은 몹시 서늘했고, 독이 든 캔디처럼 매혹적인 제안이었다.
“다시 우리 가문으로 와.”
그 순간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연신 시선을 피하기만 하던 라비가 돌연 티키의 눈을 바로 쳐다보았다. 마주친 얼굴이 생긋 웃었다. 원체 그는 변덕이 심했지만 오늘처럼 기분 좋아 보였던 적은 당최 없었다. 장난이라기엔 무책임하고, 진실이라기엔 가능성 없는 얘기였으므로 라비는 채 의심을 거두지 못한 눈빛이었다. 그러면 티키는 본격적으로 꼬드기듯이 몇 마디를 더 덧붙였다.
내가 셰릴한테 잘 말하면 참작해줄 수도 있어.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를 배신하고 워커 가에 붙어서 과연 얻는 게 뭘지.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도 그럴듯하게 해서 라비는 잠깐 혹할 뻔했다. 명면이 다 팔리고 사방이 적이며 정보꾼으로서 가치가 떨어진 지금 티키의 말은 기실 놀리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홀랑 넘어갔다간 아마 좋은 꼴을 보지 못할 테지. 순간적으로 울컥해서 그의 어깨를 밀어내니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대체 무슨 속셈이야.”
“글쎄.”
왜일까? 그가 턱을 쓰다듬으면서 한참 고민하는 척 했다. 이윽고 내뱉는 말은 실로 상식을 초월한 것이라 라비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내 것이 도망가는 꼴을 두고 못 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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