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 알렌. 나의 소중한 아이야.
모든 기억은 그로부터 시작한다. 조작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불확실성, 태초의 선험적 이미지, 무너짐, 재구축. 그리고 죽음과 영원. 일련의 진리는 마치 백사장에 파도가 스미듯 진드근히 젖어들었다. 조각나있던 장면들의 경계가 흐려지고 하나의 그림으로 연결되는 그 지점에서 박사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알렌은 박사의 그러한 찬란함을 사랑했다. 방금 건 입력된 감정이다. 기실 알렌은 어디까지가 실지 자신의 소유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온갖 기술과 태엽으로 태어났다. 그건 박사의 솜씨였고 알렌 그 자체가 아니었다. 박사는 아버지였고 창조주였으며 절대자였다. 그래서 박사를 사랑했을까?
낡은 파이프관 사이에 끼어 굳어간 기름의 쩌든 내를 맡고 무수한 시곗바늘이 불협화음으로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곳에서 알렌은 쉼 없이 오르간을 연주했다. 바쁜 나날이었다. 박사의 성은 거대한 메커니즘을 가진 기계장치였다.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정교하게 주어진 각자의 일을 수행하도록 설계되었으며 알렌 역시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고장 난 부품은 교체되거나 버려진다. 그 과정을 몇 년간 지켜보면서 알렌은 언젠가 자신에게 찾아올 기계로서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도출 불가한 명제다. 박사가 입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휘핑크림에 쉽게 거품을 올리는 요령이라든지 넥타이를 매는 스물아홉가지의 방법 따위는 알아도 알렌은 정작 박사를 몰랐다. 그가 보기에 박사는 예측 불허했고 때때로 비합리적이었다. 즐겁다가도 금방 우울해하는 변덕성과 감정의 변수에 따른 충동성, 그리고 비밀을 감춘 거짓말. 그래, 박사는 거짓말을 잘 했다. 그러니까 박사가 종종 속삭이던 사랑한다는 말이 진심인지 알렌은 확신할 수 없었다.
불확신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자고로 비극의 전조이다. 알렌은 이미 박사가 구성한 서막 속에 있었다. 각본대로 손을 뻗어 허연 목을 그러쥐면 따뜻한 살갗이 느껴졌다. 그 온도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더욱 힘을 주었던 것 같다. 사랑한다, 알렌. 내 소중한 아이야. 죽어가는 목소리였다. 아마 알렌은 평생 그 마지막 목소리를 잊지 못할 테다. 핏대가 푸르게 서고 마침내 금색 눈동자가 까뒤집혔다. 벌벌 떨리던 팔다리가 경직되어 딱딱하게 식어가는 순간―사랑한다알렌사랑한다알렌사랑한다알렌사랑한다알렌사랑한다알렌사랑한다알렌사랑한다알렌사랑한다알렌사랑한다알렌사랑한다알렌사랑한다알렌사랑한다알렌사랑한다알렌사랑한다알렌사랑한다알렌사랑한다알렌사랑한다알
“이봐. 괜찮아?”
―눈을 번쩍 떴다. 곧장 보이는 것은 그림자 진 낯선 남자의 얼굴이었다. 로브를 어깨부터 머리끝까지 칭칭 둘러 감고 오른눈에 안대를 찬 그는 퍽 흥미를 느끼는 녹안으로 알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끼릭끼릭 가쁜 소리를 내며 하드웨어가 재가동되고 있었지만 알렌은 이제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무장한 보안관들에게 쫓겼고 부식건을 맞았다. 왼쪽 어깨에 큰 손상을 입은 채 비틀거리다가 폐공장의 하수로 근처에서 쓰러졌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까맣게 녹슬어 으등그러졌어야 할 왼팔이 멀쩡한 걸 확인한 알렌은 현실감각이 돌아오지 않은 기분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뭔가 발이 바닥에 닿질 못하고 붕 떠있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양 손에 두 잔의 코코아를 내어온 남자는 이곳은 노스오르도 외곽의 여관이며 녀석들이 여기까지 수색할 린 없을 테니 안심하라고 했다. 알렌은 그 말을 반만 믿었다.
“갑자기 전원이 나가서 놀랐다구. 팔은 대충 고쳐놨어. 물론 다시 제대로 손봐야겠지만.”
“……왜 절 도운 거죠?”
“내가 누구냐고 먼저 물을 줄 알았는데.”
남자는 살짝 미소 지었다. 처진 눈매는 확실히 부드러웠으나 딱히 선한 느낌은 주지 못했다. 남자가 내미는 머그잔을 망설이다 받아든 알렌은 바로 마시지 않고 잠시 코코아 표면의 가운데를 멀뚱멀뚱 내려다보았다. 속도, 깊이도 알 수 없는 새까만 물결이 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독은 안 탔어. 남자가 빨리 덧붙였다. 어차피 독으로 죽는 몸은 아니니까 상관없는 사실이었다. 뒤늦게 제 말의 어폐를 깨달았는지 남자가 멋쩍은 듯 실실 웃었다.
“저는 그때 제가 죽을 줄 알았어요.”
알렌은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목소리는 아직 앳된 소년의 것이었지만 묘하게 압도감이 있었다.
“너는 기계잖아.”
“그래도 죽을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네가 죽인 마나 워커처럼?”
…………째깍째깍째깍. 초침 바늘 움직이는 소리가 잠깐 크게 울렸다. 그 다음순간 알렌의 시선이 남자에게 향했다. 그 눈빛은 인간의 것이라기엔 공허했고 기계의 것이라기엔 처연했다. 아니, 후자는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본디 인간은 생각한 대로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남자에겐 한때 가장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했던 오르가니스트에 대한 일말의 동정이 남아있었고, 알렌은 도주 과정에서 수십 명의 사람을 죽였다는 뉴스가 믿겨지지 않을 만큼 비공격적인 개체였던 것이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 전원을 강제 종료시켜 자멸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남자는 알렌을 향한 탐구심과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일말의 호의처럼 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네가 궁금해. 워커 박사는 완벽한 발명가야. 그런 그가 빌헬미나 원칙을 위배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다들 네 제어회로에 결함이 있다고 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거든. 내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어.”
“…….”
“뭐, 역시나 내가 맞은 것 같네.”
남자는 자신과 동행하자고 했다. 절대 신고를 하지 않을 것이며 신분을 감추는 걸 도와주겠다고도 제안했다. 그 말이 진심이든 거짓이든 알렌으로선 잃을 게 없는 조건이었다. 갈 곳이 있다면 어디로든 가고 싶었고 그것이 종말의 단애여도 상관없었다. 서로의 소요를 채운 그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동료가 될 수 있었다. 형식적으로 악수를 나눈 후 알렌은 무언가를 빠트린 듯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남자에게 물었다.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죠?”
“아. 라비라고 불러줘.”
라비. 한번 작게 중얼거렸다. 발음하기 편하고 단순명료한 것이 넉살 좋은 그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 * *
라비가 먼저 데려간 곳은 노스오르도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작은 마을이었다. 그곳에 그가 주로 들르는 정비소가 있다고 했다. 아마도 그곳에서 알렌의 왼팔을 수리하려는 모양이었다. 움직이는 데에는 별 다른 지장이 없었으므로 이대로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라비는 완고했다. 오히려 너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기계니 조금 더 스스로에게 자긍심을 가지라고 타박했다. 그게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잘 몰랐다.
라비의 지프를 타고 오면서 알렌은 다 허물어져가는 낡은 건물들을 여럿 보았다. 라비는 그곳이 고장 난 땅이라고 했다. 지금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고. 끝없이 펼쳐진 폐허 속에는 작동이 중지된 거대한 증기기관들이 덩그러니 버려져있었다. 알렌은 그것들과 자신의 차이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며 라비가 앞서 했던 말을 곱씹어보았다. 완벽하든 말든 어쨌거나 본질은 같은 고철이 아니겠는가? 그 의문을 라비가 해소해줄 것 같진 않았으니 구태여 물어보지는 않았다.
머지않아 도착한 정비소는 예상보다 다소 작고 허름했다. 낡아빠진 문짝을 밀고 내부에 들어서면 온갖 브랜드의 기계부품과 다양하게 개조된 태엽장치로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버거울 만큼 협소하여 알렌은 라비의 뒤에 바싹 붙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한쪽 벽면에는 스무 개 가까이 되는 시계가 걸려 있었는데 모두 각기 다른 속도로 초침이 움직이고 있었다. 라비는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되는 대로 밀어치우면서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어수선하게 쌓인 잡동사니 가운데 마침내 누군가가 보였다. 정돈되지 않은 흑발이 눈꺼풀 바로 위까지 덥수룩하고 창백한 인상의 사내였다. 일견에도 지극한 괴짜처럼 보이는 그는 과연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듯 제 일에 열중이었다.
라비는 그런 그를 놀래킬 심산인지 알렌을 향해 검지를 올려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했다. 그리고는 살금살금 다가가더니,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왁! 하고 큰소리 내는 거였다. 화들짝 놀란 곱사등이 단숨에 튕겨지고 그 여파로 남자가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꽤 즐거운 표정인 채 그에게 손을 내미는 라비의 모습을 알렌은 멀뚱멀뚱 구경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어어, 딕이냐….”
“오랜만이다, 제로.”
제로라 불린 남자는 금방 두 사람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사실 식탁이 멀쩡하게 있는 걸 제외하면 지나쳐온 여느 방들과 다를 바 없었다. 제로는 간만에 온 손님이니 마실 거라도 가져오겠다며 먼저 앉아있으라고 했다. 그가 나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엌 쪽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으므로 알렌은 일부러 라비의 옆자리에 앉았다.
“라비라고 했잖아요? 딕은 또 뭐예요?”
알렌은 주변을 둘러보는 체하며 딴청 부리다가 넌지시 물었다. 제 질문이 그에게 지나친 추궁 같이 느껴지지 않기를 바랐기에 약간 긴장하고 있었다. 라비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아아, 고개를 주억거렸다. 크게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내 이름이야.”
“그럼, 저한테 알려준 건 가짜 이름인가요?”
“라비는 네가 날 부를 때 쓰는 이름이고 딕은 제로가 날 부를 때 쓰는 이름.”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뭐 어때?”
라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에 알렌은 순간 어른들의 무심한 대답에 상처 입은 어린애처럼 울컥하는 얼굴을 했다. 이 불쾌함의 근원이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닌 그의 가벼운 태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 들어온 이후 지속된 묘한 감정의 동요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에게 사뭇 휘말리는 제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알렌이 반박하려다가 말고 부루퉁하게 있으니까 라비가 배시시 웃으면서 머리를 흩어뜨렸다. 그리고 능청스레 한다는 말이,
“어쨌거나 '라비'는 네 거란 거지.”
음. 알렌은 그 말에 조금 정색했다.
한참 뒤 제로는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돌아왔다. 3개월 전에 만들었던 ‘원두커피를 내리고 동시에 비스킷을 굽는 세탁기’가 말썽을 일으켜 겸사겸사 고치고 온 김이라고 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자신의 발명품에 대한 기나긴 토로를 늘어놓았던 것 같은데, 알렌은 그 말 중의 절반도 채 알아듣지 못했다. 그가 겨우 알렌에게 관심을 보인 것은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호두까기 인형’에 대한 화제가 끝났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이쪽의 꼬맹이는 누구? 머랭쿠키를 오독오독 씹어 삼킨 제로가 알렌을 보곤 턱짓했다. 그는 라비와 다른 방향으로 무례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 다 지나친 마이페이스라고 치면 제로는 거기에 사람 기분 나쁘게 하는 음침함이 섞였다. 알렌은 그다지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라비가 먼저 대답하기 전에 선수를 가로챘다. 그건 그냥 고집이었다.
“알렌 워커라고 합니다.”
일순 테이블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제로는 입을 헤벌리고 먹던 것을 떨구었다. 그러다가 허둥지둥 일어나서 가까이 다가오더니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알렌의 어깨를 강하게 쥐어 잡았다. 당황해서 라비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말릴 생각조차 없어보였다. 제로는 알렌의 몸 구석구석을 관찰하고 왼쪽 이마의 펜타클을 엄지로 벅벅 문질렀다. 그리고 말랑한 양 볼을 주욱 잡아당기는 거였다. 그때 라비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알렌은 어쩐지 굴욕적인 기분이 되어서 곧장 세게 손을 쳐내었다. 제로는 순순히 물러났지만 여전히 불쾌할 만큼 끈질기게 알렌을 응시하고 있었다. 알렌 또한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경계했다.
“아아…… 그래,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제로는 마치 꼭 경이로운 것이라도 봤다는 양 굴었다. 혼잣말을 주절거리고 멍한 얼굴로 무언가를 곰곰이 궁리하는 것 같았다. 내 말 맞지? 넌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인기인이야. 제로뿐만 아니라 다들 널 만나보고 싶어 할걸. 라비가 스푼으로 밀크티를 휘휘 저으면서 조용히 웃었다. 저런 자에게 제 왼팔의 수리를 맡기는 것도, 라비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알렌은 석연치 않은 느낌이었다. 특별취급 당하고 싶지 않거니와 누군가의 전리품처럼 보이는 것은 더더욱 사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렌은 라비에게 불응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곁을 떠났을 때, 과연 제가 어디로 갈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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