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글은 이제 쓰지 않는 건가요?”
물음은 단도직입적이었고 목소리는 완고했다. 눈빛은 직관적이었으며 금방이라도 꿰뚫을 것처럼 강렬했다. 그때 라비는 그것이 얼마나 독창적이고 압도적인 존재감인가에 대해 말없이 감탄하고 있었다. 단지 등장만으로 클럽 안의 들뜬 공기가 차분해지고 모든 이목을 그 자신에게 집중시킨 것이다. 물론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복장 탓도 있겠으나, 무엇보다 알렌 워커라는 사람이 가진 걸출함 중 하나가 바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재능이었으니. 라비의 외조부이자 선대 북맨의 말을 빌리자면 그 재능은 그를 더 난사람으로 만든다고 했다.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는 비교적 최근에야 깨달았다. 아무리 성가시게 굴어도 도저히 미워할 수 없다는 건, 그만큼 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제 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라비. 알렌이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렀다. 부드럽게, 그러나 분명 강하게 이끌리고 있다. 본래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어느 정도 타산하는 면이 있기 마련이다. 라비는 그걸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리하여 일반적인 만남에서 주도권을 잡는 것에 분명 자신 있었다. 요컨대 라비가 알렌으로부터 껄끄러워 하는 건 사람을 끄는 그의 재능과 더불어 어느 군상에도 속하지 않는 예측불가능성인 셈이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말로 거절해줄까. 한참 생각하다가 라비는 오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말했잖아. 더 이상 쓰고 싶은 것도, 써야할 이유도 없다고.”
“저희 가문의 후원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얼마든지 끊어도 상관없는데 말이지.”
“그렇지만, 저는 라비의 글을 계속 읽고 싶어요.”
알렌은 좀처럼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부끄러운 말을 쉽게 해댔다. 화법의 문제인지 아니면 그냥 천성이 그렇게 타고난 건지 모를 일이지만, 어쨌거나 그러한 직선성은 종종 지금처럼 라비를 무장해제 시키고 마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라비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당최 원하는 방향으로 휘둘려주지 않는 녀석. 그저 그게 괘씸했다. 분한 감정을 삭혀내듯 독한 양주를 단숨에 그대로 들이마시자 술기운이 곧장 목덜미까지 화끈하게 돌기 시작했다. 알렌이 멋쩍은 미소를 짓는 것을 보니 아마 지금 표정관리가 안 되고 있는 모양이다. 뭐, 굳이 숨길 생각은 없다.
2.
알렌은 라비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정확히는 그의 글과 그런 글을 쓰는 라비의 재능을.
3.
북맨이란 필명은 뛰어난 문인이었던 외조부로부터 계승받은 것으로 그는 숨이 멎기 바로 직전까지 라비에게 그 이름을 물려주는 것을 탐탁지 않아했다. 애송이가 자기만의 글을 쓰기에는 아직 한참 멀었다면서. 핀잔 섞인 듯해도 그건 분명 걱정이었다.
장례식은 간소하게 치러졌고 인수인계는 가업 기밀로써 비밀스럽게 이루어졌다. 외부적으로 북맨은 수세기를 걸쳐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려받은 저택, 물려받은 정원, 물려받은 필명…… 그리고 그 허울과도 같은 모든 게, 라비에게는 퍽이나 지루하게 느껴졌다. 혼자 남겨진지 5년이 지날 때까지 그는 고작 한 편의 수필과 세 편의 평론을 잡지사에 기고했다. 문필 활동 대신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으며 끊임없이 허무를 추구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을 망가뜨리고자 하는 시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행위적 문란으로부터 현재의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하간 그렇게 데뷔 이후 수년간의 공백을 가진 그가 마침내 내놓은 첫 작품이 바로 《비밀과 거짓말》이었다.
언젠가 알렌은 자신은 그 책의 첫머리에서부터 강한 이끌림을 받았었노라고 고백했다. 그의 표현대로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참을 수 없는 사랑스러움과 신비로운 외설성에 대한 성적매력이 느껴졌더랬다. 라비는 본문 곳곳에 몇 가지의 퀴즈들을 은밀히 숨겨놓았고 알렌은 그 흔적을 토대로 베일 뒤에 가려진 가상의 정인을 상상하거나 추리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책 자체에 깊은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며, 작가를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가지게 되었다고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몇날며칠을 걸쳐 작품 속 배경이 되는 도시의 장미덩굴 정원이 있는 모든 저택을 하나하나 뒤지는 행위가 결코 예사로운 일이라곤 할 수 없겠지만.
‘아름다운 정원이네요.’
그게 알렌이 라비에게 가장 처음 건넨 말이었다. 선대가 사거한 이후 손질이라곤 일절 해주지 않아 꽃잎이 시들시들하고 잡초가 무성하여 객관적으로 볼 때 추하기 그지없는 정원이었으니까 그에 라비는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아, 네…… 대충 대답했다. 노골적으로 성가셔하는 라비의 태도에도 알렌은 굴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혼자 사느냐는 것부터 시작해서 언제부터 이 마을에 살기 시작했는지, 책을 좋아하는지 등의 시시콜콜하고 일방적인 물음들이었다. 한참 이야기를 듣다 못한 라비가 결국 먼저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대체 내게 무슨 볼 일인데?’
그때 알렌이 싱긋 웃더니 어떤 말을 했느냐하면,
‘……언제부터인가 저는, 울적하면서 한편으로는 노곤하고 달콤한 상태가 뒤섞인 묘한 감정 상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비밀과 거짓말》의 첫 장, 첫 구절이었다. 라비는 그때 인간이 얼마나 충동적이고 가변적이며 집요한 생물인지 절감했다. 음습함이라고 해야 할까? 여하간 알렌은 산뜻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부분을 분명 가지고 있다. 대외적으론 예술수호재단을 운영하는 워커 가문의 독자이자 정평 난 신사의 이미지지만, 너무나도 올곧은 나머지 꺾일 줄 모르는 면에서 라비에게는 그를 다룰 재간이 없었다. 그런 첫 만남 이후 알렌은 ‘북맨’을 향한 후원금을 대폭 증가시켰으며 계속해서 라비에게 신작을 낼 것을 종용했다. 후원관계의 갑과 을이 바뀐 그야말로 기묘한 관계가 형성되는 순간이었다. 라비가 그를 피해 여행이란 명목 하의 도피생활을 시작한 것 역시 그때쯤이다.
4.
우체통에 편지가 하나 넣어져 있었다. 봉투의 겉면에 찍힌 재단의 날인을 확인한 라비의 미간이 가볍게 찡그러졌다. 아인트호벤으로 온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주소를 찾아낸 거다. 혹시 제 몸에 위치추적 장치라도 달아놓은 게 아닐까 싶어 괜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툭툭 털어냈다.
또박또박 정갈한 글씨체. 이건 녀석의 솜씨가 아니다. 라비가 알기로 알렌은 엄청난 악필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서신을 적어야 하는 때면 언제나 하인에게 대필을 부탁하곤 했다. 과연 편지는 재단의 정기 사교회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형식적인 인사로 시작하여 모든 수원자들은 필히 참석을 요망한다는 말로 마무리되었다. 알렌이 재단의 이름으로 라비에게 공적인 편지를 보낸 것은 거의 처음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덧붙여진 말이 꼭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아서 울컥했다.
5.
‘이 가운데 진짜 나를 찾아보라고.’
알렌은 직진밖에 하지 못했고 라비는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으며 쉽게 휘어잡히거나 흔들렸다. 줄곧 착실히 외부세계와 유리시켜왔던 그의 구역을 깨부수고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거리를 좁혀오는 존재감은 그를 불쾌하게 만들기도, 전율하게 만들기도 했다. 침범 당하는 입장은 언제나 복합적인 기로에 서게 되는 법이다. 라비는 드물지 않게 피학적 성향을 보였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으나, 영역동물로서의 본성적인 경계심 역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라비가 먼저 그러지 않았나요. 대체 나를 어디까지 쫓아올 셈이냐고 물었을 때 알렌은 그렇게 말했다.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대답은 정답이긴 했다. 그 메시지를 실제로 해독한 사람이 나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술은 싫어하는 게 이런 자리는 또 잘도 열지.”
“라비를 불러내려면 이런 수밖에 없는 걸요.”
알렌이 살짝 웃으며 라비의 옆에 다가왔다. 오늘따라 술기운이 빨리 올라서 잠시 테라스에서 밤공기를 쐬고 있던 참이었다. 난간에 팔을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면 워커 저택이 한 눈에 들어왔다. 워커 저택의 정원은 라비가 여태 보아왔던 여느 것보다도 넓고 정돈되었으며 풀 한 포기조차 의미 없이 자라는 것이 없었다. 어쩌면 알렌의 강박적인 수준의 집착은 유전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알아? 너 진짜 집요한 거.”
“그렇지만 라비가 진심으로 도망쳤다면 찾지 못했을 거예요.”
잠시간의 침묵. 서로가 던진 말의 의미를 탐색했다. 연회장의 밝은 불빛과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마치 이곳과 저쪽 세계의 공간을 차단시킨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그러한 분위기 탓인지, 혹은 알딸딸하게 오른 술기운 탓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라비는 지금 평소라면 하지 않을 행위에의 유도를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알렌.”
이름을 부르자 알렌은 라비를 마주보았다. 꽤나 오래 시선이 얽혔다. 본디 예술가란 족속은 모두 어느 정도 탐미적인 면이 있기 마련이고 라비 또한 다를 바 없었다. 알렌은 누구보다 단정하며 청순한 페이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때때로 그가 보이는 집착성과 직관성은 그를 조금 더 감각적으로 선화시켰고 그러한 극단적인 성향들의 양립은 분명 관능적이게 느껴졌다. 한참 그 얼굴을 감상하던 라비는 대뜸 알렌의 옷깃을 제 쪽으로 잡아당겨 입술을 삼켰다. 혀를 쓰지 않은 채 그의 아랫입술만을 단지 이로 짓이겨씹거나 빨았다. 알렌은 잠깐 움찔하는가 싶더니 윽, 하고 아픈 소리를 냈다. 이윽고 그를 밀어낸 라비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내가 귀찮아서 제대로 도망치지 않았다고 생각해?”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잠깐 숨을 몰아쉬던 알렌이 이번엔 먼저 입을 맞춰왔다. 아까전과 다르게 부드러운 키스였다. 그는 천천히 혀를 감고 입천장을 간질여 라비를 힘 풀리게 만든 다음 집중적으로 목구멍을 건드렸다. 숨이 차서 살짝 밀어내자 그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알렌의 키스 방식은 평소 그의 성정과 똑같았다. 확실히 다정하고 부드럽지만, 상대가 정신 못 차리게 휘말리도록 밀어붙이는 면이 있다. 계속 뒷걸음질 치다가 결국 벽에 등이 부딪혔다. 알렌은 마치 꼭 그대로 라비를 눌러 죽이기라도 할 속셈 같았다. 마구 몰아세우고 그 사이에 가두어 전혀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끝내 무릎이 꺾여 휘청거리는 라비의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끼워넣은 그가 드디어 입술을 떼었다. 침이 진득하게 늘어지고 거친 숨소리가 귓전에 가까이 들렸다. 알렌은 여전히 문란함이나 천박함과는 일절 어울리지 않는 얼굴로 라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갭에 어쩔 수 없이 흥분하게 되어버린다. 라비는 다리 사이가 뭉근하게 짓눌려지는 압박감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제가 단순히 라비의 글을 좋아해서 후원해왔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줄곧 외면해왔던 것과 마주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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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과 거짓말의 첫 구절은 프랑수아즈 사강 작 '슬픔이여 안녕'의 첫 구절에서 따온 것입니다
글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되 무게감 있는 문장이 제 서투른 글솜씨론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서 결국 인용해버렸습니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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