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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라비] 소금 기둥














“이해할 수 없어요.”




알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일에 대해 괴로워하면서도 한사코 존중하려드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건 분명 스스로를 갉아먹는 일임에 틀림없으나 남자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모른 체 시침을 떼며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남자에게는 그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혹은 그 상냥함이 한 꺼풀 벗겨진 아래에 무엇이 있을지를 생각하는 것이 퍽이나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알렌은 드물지 않게 제 강박적인 희생심에 휘둘렸고 남자는 그 위선의 출처가 궁금했다. 알렌이 재차 말했다. 너무 불합리해요. 그 목소리는 마치 애원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남자는 잠깐 침묵했지만 가장 조심스러운 말을 고르기 위함은 아니었다. 단지 자꾸만 어긋나며 서로에게 닿질 못하고 제자리를 도는 이 대화에 반점을 찍고 싶었을 뿐이다. 기본적으로 배려를 우선하는 알렌은 기다릴지언정 보채지 않았으니까. 지난날에 익힌 그를 다루는 몇 가지 방법 중 하나였다. 남자는 난간에 팔을 괴어 중앙미사당을 조금 더 내려다보다가 마침내 대답했다.




“그렇지만 온당한 일이지.”


“……저희는 라비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내가 할 일은 끝났어.”


“그들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잖아요.”


“대체 너는 내가 어쩌기를 바라는데?”




무언가를 삼키는 듯한 숨소리가 들렸다. 




“라비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윽고 하는 말은 너무 솔직해서 우스웠다.



평화의 시대였다. 백작이 불시에 종적을 감춘 몇 년 간 인류는 악마의 비극으로부터 천천히 소생하고 있었다. 어쩌면 새로운 서막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지 몰랐다. 종종 알렌은 이 평화마저 천년백작의 시나리오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사로잡혀버린다며 토로하곤 했다. 저주받은 왼눈에 언젠가부터 어떤 혼백도 보이지 않게 되어, 그게 불안하다고. 그러다 악몽에 든 날이면 신새벽에 남자의 방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수번의 봄이 찾아왔지만 눈이 녹은 자리에 곧장 풀이 자라지 않듯 알렌은 고통스러워했다. 



허나 남자에겐 언젠가 그가 버텨내고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란 믿음이 있었다. 알렌은 다소 안으로 썩어 들어가는 부분이 있었어도 결코 무너져 내리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렇게 지탱해줄 사람들이 많았다. 치열함과 헌신성. 알렌을 이루는 가치들은 때때로 그를 수렁으로 몰았으나 분명 그의 정신적인 부분을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남자가 감히 그에게서 떠나올 수 있던 이유다.



많이 자랐네. 문득 알렌이 보여 그런 말을 했다. 그러자 알렌은 입술을 짓이겨 물며 고개를 돌렸다. 그다지 살갑게 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한참 내려다보아야만 했던 눈높이가 언뜻 비슷해지고 이제 완연한 성인의 체격이었다. 사실 남자는 그를 오랜만에 보았을 때 일견에 알아보지 못했다. 일단 인상이 전과 달라졌다. 조금 더 직관적이고 정직해진 것 같았다. 자신이 없었던 수년간 어떤 일을 겪었을지 궁금했지만 그런 것을 묻는다한들 알렌은 대답해주지 않을 테니 남자는 다만 생각했다. 가엾기 그지없는 알렌 워커의 삶, 그 삶에 대하여.



무엇이 그를 이토록 변하게 했을까? 아니, 그는 평생에 걸쳐 좌절하고 탈피하기를 반복할 운명인걸까?



신부가 성찬식을 올렸다. 신자들이 한차례 영성체를 받고 나면 이제 곧 미사가 끝날 것이다. 그때 남자 역시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애초에 알렌을 만난 것 자체가 계획 밖의 일이었으므로 뭐, 약간의 변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불현듯 떠올렸다. 아. 알렌, 네게 돌려줘야 하는 게 있었는데. 




“…내가 조금 더 맡아놓을게.”




남자가 씨익 웃었다. 그에 알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러나 확연히 지친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잠시 동안 눈을 마주치며 그들은 서로의 말이 던진 의미를 탐색했다. 여전히 아무것도 소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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