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니 창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는 빗방울이 연신 창문을 후득후득 두드렸고 구름 낀 하늘은 회색으로 보였으며 평소보다 낮게 드리운 것 같았다. 낮인지 저녁인지도 분간되지 않았으나 어차피 최근의 알렌에게 이미 그러한 시간감각은 사라진지 오래다. 이윽고 상체를 일으키려다가 팔이 불편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알렌은 뒤늦게 팔뚝에 꽂힌 링거바늘을 보았다. 아. 이번에도 살아났구나. 무감각하게 어제 먹은 수면제의 개수를 헤아렸지만, 이제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라비는 발갛게 퉁퉁 부은 눈을 하고 방에 들어왔다. 몹시 파리해보였다. 그 때문인지 알렌이 일어난 것을 확인하고도 그저 슥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침대 맡 의자에 앉은 라비가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안 그래도 창백한 낯빛이 그늘져 더욱 초췌해졌다. 그 모습이 어찌나 나약해보이던지 알렌은 하마터면 그를 동정할 뻔했다. 메마른 손과 전체적으로 야윈 실루엣을 응시하면서 알렌은 이 침묵을 극복해야할 필요성에 대해 생각했다. 무슨 말을 꺼내더라도 지금의 라비는 어떤 대답도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알렌은 처세력이 좋은 사람이었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까지는 잘 몰랐다.
“……크레페. 먹고 싶어요.”
그렇게 딴청부리듯 말을 걸면 라비는 무시하는 척하다가도 슬쩍 이쪽을 쳐다본다. 건조한 시선에선 더는 빛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잠시 마른세수를 하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바탕 울음으로 다 갈라진 그의 목소리는 마치 기권하는 것처럼 들렸다.
“어. 사줄게.”
“…….”
“그러니까 얼른 일어나. 멍청아.”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으므로 가장 약한 생물이다. 그럼에도 때때로 외톨이를 자처한다. 스스로 죽음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사실상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사람은 죽음과 가까워질수록 예측불허하며, 드물지 않게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기생형은 약 따위로 쉽게 죽지 않는다. 이노센스가 깃들게 된 신체는 기본적으로 보통의 인간보다 강인해지며 여타 유기체들과는 다른 생물학적 알고리즘을 보인다. 알렌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초체력이나 신진대사량 따위야 교단 내에서도 단연 으뜸이었고 회복속도를 논하자면 비교 가능한 상대가 없었다. 어느 파인더는 그게 마치 꼭 신의 축복 같다고 말했다. 목숨 하나가 아까운 시대에 그 누구보다 선택받은 육체가 아니겠느냐고. 알렌은 그때 그냥 말없이 웃었던 것 같다. 죽을 권리조차 박탈당한 채 오직 파괴만을 강요받는 삶이 과연 의미 있을까.
알렌은 종종 우울함에 빠졌다. 아니, 이건 비단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파인더, 과학반, 엑소시스트, 심지어는 주방장이나 청소부까지 교단의 모두가 때때로 강렬한 무기력증과 불안증에 시달리거나 신경안정제를 처방받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매일 아침마다 패전소식을 전해 듣고 바로 어제 보았던 동료의 시체가 불구덩이에 던져진다. 전쟁터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산다는 건 그렇게 어느 정도의 정신력 소모를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응당하다. 따라서 알렌은 자신의 우울함을 특별히 토로하지 않았다. 그래왔었다, 지금까진.
이젠 어째서 자살시도란 명목하에 스스로를 학대하기 시작했는지 이유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임무지에서의 어떤 일을 계기로 하여금 그가 몹시 비극에 빠졌더라는 사실이었다. 비극은 곧 환멸이 되고 환멸은 자기혐오를 불렀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자신을 해치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방안에서 칼로 손목을 긋고 수면제를 한주먹 삼킨 후 천천히 눈꺼풀을 눌러 감았다. 분명 그때는 혼자였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눈앞에 라비가 있었다. 라비는 알렌을 붙들고 미친 사람처럼 덜덜 떨면서 울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어설픈 칼질로 너덜너덜해진 손목에 붕대를 감겨주었다. 의료진이 아니라 엉성할 수밖에 없는 솜씨였지만, 알렌은 그 손길에 정말 놀라울 정도로 갑작스럽게 마음이 편해졌다. 죽지 않았고, 더 이상 비참함은 없었으며, 왼쪽 가슴 부근에서 번지는 감격스러운 무언가가 메마른 심장을 적시고 있었다. 그 얄팍한 위안에 걷잡을 수 없이 중독된 것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날 울음으로 체력을 다 방전한 라비는 새벽녘 알렌의 침대 맡에 몸을 웅크리고 쪽잠에 들었다. 반면 알렌은 잠이 도통 오질 않았다. 오히려 그의 뇌는 여느 때보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지리멸렬한 감정이 교호하고 마침내 그 엇갈림의 끝에서 알렌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결코 이 지독한 운명을 견딜 수 없다고 결론 내었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에게는 동료가 곁에 있었다. 함께 감정을 혹사하고, 대신 눈물을 흘려주는 존재가. 이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라비는 다른 단원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일이 커지는 것을 싫어하는 알렌을 위한 배려였다. 대신 과로 때문에 잠시 휴식을 취하는 거라고 일러두기로 했다. 라비는 결국 혼자서 그 사태를 온전히 감내하고 정리해야 했다.
‘한 번만 더 이러면 너 얼굴 안 볼 거야.’
라비가 퉁퉁 붓고 충혈 된 눈으로 알렌을 노려보았다. 생기 있던 녹안이 흐려져 있었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젖은 볼에 가닥가닥 붙어 있었다. 퍽 우스운 꼴이었으므로 크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알렌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은 마지막이 아니었고, 라비의 으름장 역시 진심이 아니었다.
“좋은 아침, 제리.”
“좋은 아침, 알렌 군. 오늘따라 얼굴이 좋아 보이는데?”
그런가요? 알렌이 소리 없이 웃으면서 배식을 받았다. 감자수프와 토마토 샐러드. 그간의 아침상에 비하면 제법 간소한 식단이다. 알렌의 평소 식사량을 알던 제리였으므로 그의 식판은 다른 사람보다 무거웠다. 빈자리를 둘러보던 알렌은 혼자 식사를 하고 있는 리나리의 맞은편에 가 앉았다. 리나리는 고개를 들어 밝게 아침인사를 해주었다.
“어제 저녁에 어디 있었어? 안 보여서 찾았잖아.”
“아. 졸려서 조금 일찍 잤어요.”
“알렌이 저녁을 굶다니, 상상도 못할 일인걸.”
그 말을 들은 알렌이 푸흐흐 웃었다. 대화는 한참이나 일상적인 소재를 화제 삼아 흘러갔다. 코무이의 괴짜스러운 실험에 과학반이 한바탕 고생을 했다는 얘기부터 교단 정원에 새끼를 낳은 길고양이, 방한용 단복을 새로 제작 중이라는 소식까지. 그렇게 사소한 것들이 알렌에게는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중 리나리가 방울토마토를 포크로 콕 집으며 앗참, 하고 운을 뗐다. 알렌은 의아한 기색으로 뒤이어 나올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라비 못 봤어? 어제 저녁에 너 찾으러 간다고 하고선 못 봤네.”
“―라비라면 방금 보고 나오는 길이에요. 세상모르고 자고 있길래 차마 못 깨웠어요.”
“그렇구나……. 그래도 아침은 챙겨먹어야 할 텐데.”
제가 나중에 빵을 좀 가져다주려구요. 별 걱정은 마세요. 알렌은 매 자살시도 때마다 번번이 자신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지던 라비를 떠올렸다. 아마 라비는 지쳐가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가 저의 곁에 있어주었듯 저도 그의 곁에 있어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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