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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라비] 음험한 것을 논한다면














라비에게는 평소보다 한 시간 가량 이른 기상이었다. 이유는 딱히 없다. 그냥 밤잠을 설쳤다. 깨고 나니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 얕은 꿈이었는데 눈을 떴을 때 식은땀을 흠뻑 흘리고 있었던 걸 보면 대단한 악몽이기라도 했나보다. 간밤의 피로가 채 가시지 않아 잠이 덜 깬 손길로 비몽사몽 칫솔에 치약을 짜면서 그는 문득 요사이 꾼 꿈들이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꿈치고는 제법 과한 정신력 소모를 요한다는 점이다.

해석학에서 꿈이란 뇌의 휴식이나 근육 이완이 이뤄지지 않은 렘수면 상태에서 전이되는 무의식의 표상으로 그 시점에 처한 환경적 요인과 정신적 스트레스 등을 매개하여 적당한 상징성을 가지고 2차 가공되는 것이라고 본다. 요컨대 꿈을 조심스레 해체해서 거슬러 올라가면 이드의 세계에 도달하게 되며, 이를 통해 초자아를 감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꿈과 현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라비는 최근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기묘한 감정의 침범과 그 근원을 알아차려야 할 필요성에 대해 절실히 느끼고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불면증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대체 무엇이 제 무의식을 이토록 불안하게 긴장시키고 있는 것일까. 라비는 물을 한입 머금고 헹군 다음 뱉어내기를 몇 번 반복했다. 딴생각을 하고 있어서인지 그러는 동안 곁에 누가 다가온 지도 눈치 채지 못했다. 양치를 마친 후 칫솔과 컵을 제자리에 놓고 뒤를 돌아본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바로 코앞에 방금 막 일어난 듯 머리카락이 사방팔방 뻗친 알렌이 우두커니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알렌은 잠기운에 눈이 반쯤 감겨서 애 같은 얼굴을 한 주제에 어딘가 찬바람이 쌩쌩 느껴지는 서슬을 풍기고 있었다. 왜인지 그 기색에 압도되어서 라비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추스르며 조금 뒷걸음질 쳤다. 

“제발 인기척 좀 내…….”

“라비가 둔한 거면서.”

알렌이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라비를 휙 스쳐지나갔다. 저게 오늘은 아침인사도 안 하네. 라비는 잠깐 황당하게 알렌을 쳐다보았지만 그의 태도에서 이상함을 감지한 것은 비단 오늘 뿐만이 아니었다. 요즈음, 정확히 말하자면 최근 보름에 달하는 기간. 그 동안 알렌은 지금처럼 라비에게 무뚝뚝하게 굴거나 불만이 있는 것처럼 퉁명스러웠고 그러면서도 자주 눈을 마주쳤다. 마치 내내 일부러 라비를 쳐다보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우연의 일치에 불과하다며 그냥 넘기기엔 그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던 게 문제다. 



언제는 대련 중인 단원들을 구경하면서 크로울리와 떠들고 있었는데 문득 고개를 돌린 곳에 알렌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갓 대련을 마치고 마른 수건을 머리 위에 뒤집어쓴 그의 그늘진 얼굴에서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는 것을 목도한 순간 라비는 움찔, 하고 발끝부터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눈을 마주친 3초가 꼭 3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침을 꿀꺽 삼킨 라비가 알렌을 보며 어색하게 아하하 웃다가 냉큼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데도 뒤통수가 계속 따갑더랬다. 결국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온 그는 성큼성큼 텅 빈 복도를 걸으면서 억울함에 찔끔 눈물을 흘렸었다



대체 너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알렌의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던 라비의 간절한 물음은 소리가 되지 못하고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갔다.

*   *   *




“알렌 군, 저번 아인트호벤에서의 일로 물어볼 게 있다고 실장님이 부르시더라.”

“네, 갈게요.”

기어코 도서관까지 쫄랑쫄랑 쫓아온 알렌이 코무이의 부름에 떠나간 후에야 라비는 참았던 한숨을 몰아쉬며 소파 위에 발랑 드러누웠다. 읽던 책은 배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았다. 긴장이 풀리자 불현듯 라비는 자신이 예상보다도 훨씬 더 알렌을 의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전보다 대화가 대폭 줄어들었고 그와 있는 것이 불편해졌다. 그건 가능한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라비에게 달갑지 않은 일임에 분명했을 터다. 높은 천장과 크리스탈로 된 샹들리에를 멀뚱멀뚱 쳐다보다 조명 때문에 눈이 부셔서 눈꺼풀을 눌러 감았다. 그렇게 눈을 감은 채 곰곰이 머리를 굴리다보면 딱 하나 잡히는 구석이 있었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저녁식사 시간에 다 같이 모여 수다를 떨면서 문득 이 전쟁이 끝나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처음엔 다들 그 화제에 대해 야유하거나 지탄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둘 조용히 각자의 소원을 말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가족 곁으로 돌아갈 거랬고 누군가는 못다 한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룰 거라고 말했다. 그때 알렌은 그냥 다른 사람들 말에 맞장구나 치고 있었다.

‘알렌, 너는?’

‘저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비가 넌지시 묻자 알렌은 전혀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는 투로 글쎄요, 하고 말을 흐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또 그런 식으로 혼자만의 엄숙함과 사명감에 빠지려는 것 같았다. 그게 참 한심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 애잔하기도 해서 라비는 이 녀석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잠깐 고민했다. 풀이 죽어가지곤 미트볼을 포크로 연신 쿡쿡 찔러대는 알렌의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으니 꿈뻑꿈뻑 올려다보는 얼굴이 꼭 강아지랑 비슷했다. 아마 하얗고 털이 부드러운 종류.

‘바보 같아서 안 되겠네, 내가 정해줄게. 이런 건 어때? 제리의 모든 메뉴를 다 먹어보고 감상문 쓰기. 한 평생은 걸릴걸.’

‘……그걸 왜 라비가 정해요.’

투덜투덜 말하면서도 알렌은 금세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기색이었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간다고 생각하며 라비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고로 알렌 같은 타입은 혼자서 모든 걸 끌어안은 채 펑 터지기 전에 타이밍 좋게 바람을 빼줘야 하는 법이다. 



시간이 지나자 식당에 사람들이 조금 더 늘어났다. 빈 그릇이 차례로 치워지고 새로운 요리가 올려졌다. 칠면조 구이와 양 훈제였다. 주방에서 연말이라고 특식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라비는 사과주스를 홀짝이며 옆 테이블의 말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어쩌다 거기까지 흘러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전 왕권이 교체된 스페인 정세에 대한 얘기가 한창이었다. 그가 느끼기에 교단은 때때로 따분한 대화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같았다. 금세 심심해진 라비는 턱을 괴고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다가 알렌과 눈이 마주쳐서 씨익 웃어준. 주변이 시끌벅적했고 알렌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입술의 모양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어느 정도 들렸다.

‘그러고 보니 라비는요, 따로 하고 싶은 일 있어요?’

‘으음, 난 여행정도일까.’

‘어디로 갈 계획인데요?’

그마저 썩 재밌다곤 할 수 없는 주제였다. 그래도 알렌에게만큼은 약한 편인 라비는 이번에도 성실히 그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전 세계. 전 세계의 유적들을 다 둘러보고 싶어. 이 기록이 끝나면 바로 떠날 거야.’

………그렇게 말한 순간 굳어지던 얼굴이 분명히 기억났다. 



그래, 그때부터였다.

*   *   *







잠깐 잠이 든 모양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자 시야에 뿌옇게 흐려진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라비는 졸린 눈을 깜빡깜빡거리며 손등으로 비볐다. 그림자가 한층 선명해졌다. 잠이 덜 깼다고 생각했다. 미간을 찡그리곤 상체를 일으켰다. 오후가 다 되었는지 창 밖에서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수면부족 때문에 어쩐지 낮잠만 잔뜩 느는 것 같다. 라비가 고개를 다시 돌렸을 때, 누군가 눈앞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렌이었다. 알렌은 아무래도 오늘 라비의 심장을 떨어지게 할 작정인 듯 했다.




“—뭐, 왜, 뭐야, 너?!”


“그냥요. 라비가 너무 무방비하게 자고 있길래.”




알렌은 시침 뚝 떼며 라비가 누운 소파에 걸터앉았다. 소파가 좁아서 몸이 제법 가깝게 붙었다. 기겁한 라비가 얼른 소파 끄트머리로 도망갔다. 꽤나 우스운 꼴이었다. 만약 그에게 꼬리가 달려있었다면 털을 빳빳이 세우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경계하고 있음이 분명한 라비의 태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알렌이 수상한 미소를 지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다가 누가 안대라도 벗겨보면 어쩌려구요? 라비가 숨기고 싶어 하는 거잖아요?”




그 말에 심장이 철렁하고 소름이 쫙 끼쳤다. 한마디, 한마디에 날카로이 벼린 감정이 느껴졌다. 그가 이토록 적나라한 속내를 토로했던 적은 없었다. 그간 느꼈던 위화감의 연장선이었다. 끈질기게 시선을 마주치는 알렌을 보면서 라비는 식은땀 나는 손을 꽈악 쥐었다.




“너 그랬어?”


“아뇨.”


“………좋아, 너한테는 언젠가 말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게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아니다?”




알렌이 무언가 탐탁지 않은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라비는 슬슬 발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알렌이 직접 대체 뭐가 불만인지 말해주길 바랐는데, 지금은 그저 이 공간에서 도망치고만 싶었다. 이렇게까지 사람을 궁지로 몰아세우는 그가 원망스러우면서도 그를 탓할 만큼 라비는 모질지 못했던 것이다. 그냥 예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서로 깊이 파고들지 않고, 평범하게 장난치며 농담 따먹기나 하던 사이로.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고 떠듬떠듬 말하는 순간 다리에 문득 알렌의 차가운 손끝이 닿아서 깜짝 놀랐다.




“그렇게 말하고 나중에 도망갈지 어떻게 알아요.”


“무슨……….”


“봐, 지금도 피하고 싶어 하고 있잖아요. 비겁하게.”




알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플 정도의 악력은 아니었으나 서서히 발목을 쥐어오는 감각에 라비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건 네가 너무 다가오니까 그런 거지! 하고 머릿속에서 서럽게 외치는 목소리는 혀가 굳어 도통 나오지 않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마른 종아리를 쓸어내리고 안쪽으로 오그라들어 덜덜 떨고 있는 발가락을 매만졌다. 라비는 이제 거의 소파에서 떨어질 것 같았다. 




“……다리라도 부러뜨리면 도망치지 못하겠죠?”


“…….”




못 들을 걸 듣기라도 한 사람처럼 입을 떡 벌린 라비를 두고 알렌은 능청스레 웃었다. 그가 정말로 다리를 부러뜨리진 않겠지만 분명 그 말만은 진심처럼 느껴졌다. 그는 지금 노골적으로 자신의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몸에 힘이 풀린 라비가 뒤로 발라당 넘어가지 않았다면 아마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묘해졌을 것이다. 




“물론 농담이에요.”




라비에게 손을 내밀면서 알렌은 냉큼 덧붙였다. 라비가 그 말에 곧장 경계를 풀고 배시시할 리가 없다. 알렌의 손을 잡지 않고 한참동안 노려만 보다가 시선이 얽혔다. 그곳에 눈을 빛내고 있는 알렌은, 더 이상 라비가 알던 가엾기만  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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