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한다고 생각해. 지금 하는 일은 전부 내려놓고. 알렌은 한 번도 외국에 나가본 적 없지? 그렇게 말하는 리나리의 목소리가 상기되어 있었다. 워낙 다정한 사람이니까 줄곧 걱정하고 있었던 거겠지. 알렌은 미안함과 고마움의 인사를 따로 전하는 대신 그냥 가볍게 웃었다.
유명 항공사의 비즈니스석을 예매하겠다는 리나리를 만류하고 선편을 고른 그는 여행 가방을 챙기면서 문득 자신이 가진 것이 얼마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껏해야 칫솔 세트와 갈아입을 옷 몇 벌, 낡은 작곡노트, 그리고 지갑. 만약 피아노가 가방에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면 챙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정도면 일 중독이야, 하고 리나리가 또 잔소리를 할 테지만 그만큼 피아노는 알렌의 전부였다.
프랑스로 가는 이유는 단순했다. 이번에 사운드트랙 작곡을 요청받은 독립영화의 촬영지가 파리였기 때문이다. 감독은 촬영장 견학이 작업에 도움이 될 거라고 말했고 알렌은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런던을 벗어난 적 없는 그에겐 제법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바다너머에는 더 넓은 세상이 있다면서, 언젠가 네가 이곳으로부터 탈피해야하는 때가 올 것이라고 종종 마나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 알렌은 세상을 더 넓힌다거나 새로워지고 싶은 마음일랑 없었으므로 그냥 그게 어른이 되면 저를 내쫓겠단 소리인 줄 알았다. 그 말을 들은 날 밤에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곤 했더랬다. 뭐, 어디까지나 겁쟁이였던 시절의 얘기다.
촬영지는 파리 항구에서 고속버스에 올라 1시간 정도 달리면 도착하는 근교로 그다지 멀지 않았다. 알렌은 창문가에 앉아서 이동하는 내내 바깥 풍경을 구경했다. 고작 바다를 건넜을 뿐인데 화폐도, 언어도, 건물 양식도, 심지어는 길거리 음식도 전부 달랐다. 젤라또 아이스크림과 피스타치오 마카롱, 바나나크림 크레페를 차례로 사먹고 나니 수중에 남은 것이 20유로 한 장뿐이라 은행에 들러 환전했다. 나오는 길에 횡단보도 앞에서 시나몬 츄러스를 팔기에 12유로를 또 지출했다. 그런 식으로 자꾸 여기저기로 빠지다보니 촬영장에는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다. 출입을 통제하는 경비원에게 감독과의 친분을 설명하고 나서야 겨우 들어설 수 있었다. 촬영장은 생각보다 단출했지만 영화 촬영에 있어 필요한 최소한의 장비는 갖추고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던 감독이 어정쩡하게 서있는 알렌을 발견하자 활짝 웃으며 반겼다.
“어때, 프랑스 여행은 만족스러웠습니까?”
“덕분에요.”
잠시 카페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한다. 그의 이름은 로망 위베르. 목덜미를 덮는 반곱슬의 레몬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가진 전형적인 프랑스인이었는데, 나이는 스물아홉으로 알렌보다 고작 다섯 살이 많았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서유럽 영화계의 유능한 인재로서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로망은 영화 음악엔 영 문외한이라며 한사코 작업 제안을 거절하던 알렌에게 삼고초려 하여 결국 승낙하게 만드는 끈질김까지 지니고 있었다. 당신의 연주곡이 아니면 안 된다는 직설적이고 간절한 부탁 앞에 알렌은 그리 강하지 못했다. 애초에 단호한 성정이 아니거니와 특히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약했던 탓이다. 이윽고 아메리카노 두 잔이 내어져 왔다. 사사로운 안부를 주고받다가 로망이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제본된 책자를 올려놓았다.
“이게 이 영화의 대략적인 시놉시스입니다.”
표지에 커다랗게 《OWEN》이라고 적혀있는 제목을 보고 알렌은 잠시 표정을 굳혔다가 재빠르게 숨겼다. 워낙에, 흔한 이름이니까 뭐, 우연히 겹칠 수도 있을 것이다. 다행히 그 순간적인 반응을 로망은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의 부연 설명이 이어질수록 심장이 빠르게 쿵쿵 뛰기 시작했다. 혹시 알까 모르겠는데, 소설 원작이 따로 있거든요. 그 말을 들었을 땐 기어코 이번 작업을 거절하지 못한 걸 진심으로 후회하게 됐다.
“원작을 읽으시면 작업에 더 도움이 되실 거예요.”
“……이미 읽어보았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데 문득 기나긴 허방의 끝에 다다르듯 스스로가 몹시도 비참해졌다.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를 이런 식으로 파헤쳐질 줄은 몰랐다. 웃는 얼굴을 꾸며내는 것은 알렌의 특기였으니 로망에게 들키지는 않겠지만 손끝이 바르르 떨리는 건 감출 수가 없어 커피가 담긴 잔을 그저 꽈악 붙들었다. 로망은 그것 참 다행이라 말하며 기분 좋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이 책을 읽는 순간 알렌의 피아노 선율이 떠올랐다면서, 처음부터 OST를 염두에 두고 영화화를 결정했노라고 말했다. 그에 알렌은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고민했다. 과찬이라느니 감사하다느니 머릿속에선 형식적인 인사말들이 이미 출력되어있었는데 입 밖으로 좀처럼 내뱉어지질 않았다. 입술이 메말라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망. 여기서 뭐하고 있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그때 그립다거나 애달프다는 감정보단 불쾌감이 먼저 앞섰다. 살짝 울컥하고 차오르는 토기를 느낀 것도 같다. 굳어있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아, 워커 씨와 대화를 좀.”
“워커?”
그리고 마침내 3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 눈을 다시 마주하면서, 알렌은 이번 여행이 최악으로 치닫고 말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 * *
로망이 소개해준 호텔은 촬영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다. 프런트에서 늦은 체크인을 하고 객실 키와 조식 쿠폰을 받았다. 1208호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띵동, 하고 도착음이 나고도 멍하니 있다가 옆 사람이 이상하게 볼 때쯤 허둥지둥 내렸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몹시 피로했으나 잠이 오질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또렷해지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그만두겠다고 해볼까. 아니, 프랑스까지 온 마당에 그건 아무래도 무리겠지. 로망은 알렌과 라비가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라는 걸 알았을 때 도리어 반기는 기색이었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젊고 유망한 소설가와 피아니스트, 그리고 영화감독의 팀워크가 얼마나 환상적인지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다가 굉장한 작품이 나올 것이라면서 기대에 찬 눈을 빛냈다. 그런 사람 앞에서 초를 치자니 커밍아웃을 할지언정 별로 내키지 않았다. 어차피 음악가와 원작자가 만날 일은 별로 없을 테니 그냥 눈 딱 감고 작업을 마치자고, 그렇게 다짐하며 침대 위에서 한참을 뒹굴뒹굴 거리다 그대로 잠들었다.
다음 날의 촬영지는 근방의 오래된 성당이었다. 무교인 주인공이 고해성사를 하면서 위선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작품 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했다. 이 부분에서는 몰입이 거슬리지 않게 나지막하고 느린 선율의 단조로. 모니터링을 하며 틈틈이 수첩에 메모를 했다.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짧은 장면이라길래 오래 걸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오케이 사인이 영 떨어지지 않아 어느 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때쯤 되니 알렌도 집중력이 슬슬 떨어지고 있었다. 잠을 잘못 자서 뻐근한 왼쪽 어깨를 통통 때리는데 문득 눈이 닿은 곳에 라비가 있었다. 유독 잘 보이는 곳에 그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그에게 시선이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순간 화들짝 놀라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렸다. 몰래 남을 쳐다본다는 것이 무례한 짓임은 인식하고 있지만 동시에 은밀하고 불가항력적인 이끌림을 받고 있었다. 캐주얼한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라비는 로망의 옆에 나란히 서서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뒷모습뿐이 보이질 않아 표정을 짐작할 순 없었으나 제스처나 분위기를 보건대 친근하고 다정한 사이임은 분명했다. 그러니까, 단순히 영화감독과 원작자의 사이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그때 로망이 아주 익숙하게 라비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그리고 끌어당겨서는 한 치의 틈도 없이 가까이 붙게 만들었다. 알렌이 눈을 화등잔처럼 뜨고 흠칫하자 옆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났다. 시나리오 디렉터였다. 알렌은 자신이 그의 기척을 일절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며, 로망과 라비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들켰다는 사실에 화끈 열이 올라서 살짝 비틀거렸다.
“워커 씨는 아직 모르나? 두 사람, 촬영장에서 유명한 닭살 커플이에요.”
“………아. 그렇군요.”
거기에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아버렸다.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후로부터 40분이 더 지났다. 로망을 만족시키는 장면은 아직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는지 잠시 쉬는 시간이 이어졌다. 온갖 촬영장비로 부산한 성당을 나와서 잠깐 바람을 쐬고 있으려니 마침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고 있던 라비를 만났다. 그야말로 최악에 수렴하는 운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대로 모르는 척 해주면 좋으련만 라비가 워낙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성정인 게 문제였다. 그는 속 편한 얼굴로 담배를 비벼 끄곤 손을 흔들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담배향이 물씬 났다. 순간적으로 찡그러진 알렌의 표정을 캐치한 라비가 맞다, 미안. 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래도 역시 알렌에겐 불쾌할 만큼 가까운 거리임엔 변함이 없었다.
“3년만이네.”
“네.”
“이런 데서 볼 줄은 꿈에도 몰랐지. 안 그래?”
“그러게요.”
“프랑스는 어떻게 왔어? 비행기?”
“아뇨. 배로.”
“아하.”
알렌의 단답 때문에 자꾸 대화의 흐름이 뚝뚝 끊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비는 전혀 기죽은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어색함 없이 일상다반사적인 화제를 꺼내며 얘기를 주도해나갔다. 그는 알렌의 기준으로 볼 때 연애경험이 풍부하고 여러모로 인간관계에 능숙한 남자였다. 그와 교제할 당시에도 그 여유로움에 마구 휘둘렸던 것 같다. 그래, 당신에게 나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람이고 어떤 흔들림도 줄 수 없다 이거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울컥, 하고 무언가가 가슴 언저리 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토록 멀쩡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서 더할 나위 없는 패배감을 느꼈다. 느린 숨을 토한 후 내뱉어지는 말은 그런 악의로 똘똘 뭉쳐있었다.
“라비는 프랑스인이 취향이었나 봐요.”
갑작스레 적막이 흘렀다. 뒤늦게 제가 한 짓을 깨달은 알렌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건 과거 연인 사이였던 걸 떠나서 사람 간의 예의가 아닌……. 서둘러 라비의 눈치를 보았지만 그는 그저 멀뚱멀뚱 가만히 있었다. 아. 읽을 수 없는 표정. 알렌은 예전부터 라비의 이런 점을 가장 껄끄러워 했다. 좀처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 이쪽에서도 잔뜩 경계를 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이윽고 라비가 우습다는 듯 폭소했다. 그 웃음소리가 가시처럼 온몸을 쿡쿡 찌르는 것 같아서 알렌은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가 않았다.
“취향이라기보다는 뭐…… 만나다보니 어쩌다 프랑스인이 걸린 거지.”
쉬는 시간이 끝날 쯤이 되자 라비가 연락처를 물어왔다.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뜨고 싶은 심경이라 알렌은 거절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서둘러 번호를 찍었다. 핸드폰을 건네는 손끝이 스쳤다. 순간 감전된 듯 화들짝 손을 내뺐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성당으로 돌아가면서 라비는 알렌을 향해 씨익 웃었다.
“여전히 애송이구나, 알렌.”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망연자실 바라보며 알렌은 생각했다. 망했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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