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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라비] 은총이여 오라













1. 떠돌이 마법사와의 조우



알렌이 라비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와 만난 것은 지독한 우연 혹은 싱거운 운명 쯤 될 것이다. 그가 아직 제네바 슈비츠의 팔라딘이었던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운 교리에 의하면 모든 것은 순리에 의해 돌아가며 그게 바로 신의 뜻이자 유일선이라 하였으나 기실 라비와의 인연을 그렇게 장황하게까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썩 유쾌하지 못한 사건으로 얽혔고 어쩌다보니 동행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 전말을 설명하려거든 알렌이 교회에서 보낸 추격자들에게 쫓기다가 갓 크로노베리에 도착했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달은 전투 끝에 오랫동안 함께 해온 애검마저 부러지고 간신히 목숨만을 부지하여 마을 어귀 곳간에 숨어들었던 그때. 화살에 스친 허리춤은 피범벅이었으며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바람에 부러진 왼발은 절뚝거리고 있었다. 대강 지혈을 한 후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알렌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했다. 일단 이 지긋지긋한 사제복을 팔아치워야겠다. 고급스러운 은장식이 주렁주렁 달려있으니 제법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으리라. 팔고 남은 돈으로는 역시 새 옷을 사야겠지. 가능한 서민 같은 옷으로……. 그러고 나면 주린 배를 채울 작정이었다. 알렌은 상처를 신성치유하며 죽은 듯이 하루를 보내고, 그 다음 날 바로 시장으로 나섰다.



크로노베리는 동쪽 숲 특유의 험난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완벽한 자급자족을 이루고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는 건 한편 전쟁과 무관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품을 하며 한가로이 목축을 하는 양치기와 거리를 까르르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곤 알렌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신 앞에 인간은 동등한 것인데 평화라는 권리는 당최 보편타당하질 않다. 그는 바로 엊그제까지 전장의 이슬처럼 사라져야 했던 가여운 생명들의 한가운데 있었지만 지금은 마치 그것이 한낱 처연한 꿈같았다. 그렇게 멍하니 길을 걷다가 꽃 파는 아이와 부딪혔다. 떨어진 꽃바구니를 주워 담고 사과의 의미로 가장 비싼 꽃 한 송이를 샀다. 이윽고 사제복을 판값으로 각종 소모품 구입 및 식사를 마치자 3파운드 정도가 수중에 남았다.



여기서 안타깝게도 알렌이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는데, 그가 교회에서 나고 자라 여느 시세나 금전감각 따위에 취약하다는 점이었다. 마지막으로 성검을 사기 위해 무기상을 찾아갔을 때 알렌은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에 헛숨을 들이켰던 것이다. 주인장에게 3파운드로는 고작해야 도금된 단도 한 자루도 사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척 봐도 세상물정 어두워 보이는 외래 청년이 안타까웠는지, 그는 혀를 끌끌 차더니 성검이 필요하거든 보리밭 쪽으로 가보라고 했다. 그곳에 얼마 전부터 정착하기 시작한 떠돌이 나그네가 진귀한 무기들을 잔뜩 가지고 있다면서, 그렇지만 수상한 남자니 신중히 생각해 보라고 귀띔해주었다. 그에 알렌은 지푸라기라도 잡은 심정이었다. 금방 환해진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의 말을 전한 뒤 곧장 그가 말한 곳으로 향했다.


이때쯤 눈치 챘겠으나 그 떠돌이 나그네가 바로 라비다. 그는 오른눈에 안대를 차고 허름한 로브를 휘감은 채 끝이 둥글게 굽은, 제 키만한 길이의 완드를 들고 있었으므로 금방 눈에 띄었다. 무기상 주인장의 말처럼 실로 수상해 보이는 행색이었던 것이다. 덩치 큰 건달 셋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그중 가장 험상궂은 사내가 대뜸 라비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눈을 질끈 감은 얼굴에 커다란 주먹이 날아가는 순간, 알렌은 저도 모르게 짐을 내던지고 달려가 그 손목을 잡아챘다.



“저…… 사연은 잘 모르겠는데, 다들 말로 하는 게 어때요?”


“네놈은 또 뭐야?!”



불쾌한 듯 인상을 마구 구긴 사내는 다짜고짜 알렌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알렌이 가볍게 몸만 틀어 일련의 공격을 피하자 곧이어 양쪽에서 다른 이들이 달려들었다. 한명은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한명은 팔을 등 뒤로 꺾었다. 남은 한명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각목을 집어 들길래 하는 수 없이 배를 가격했다. 나름 힘을 조절한다고 한 건데 저만치 날아가서 나무에 처박혔다. 허겁지겁 도망가는 사내들의 뒷모습을 향해 알렌은 다신 부정한 폭력을 쓰지 말라며 손을 휘휘 흔들어 주었다.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시키고 나니 옆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라비가 두 손을 모으고 방싯방싯 웃고 있었다.



“당신 되게 강하네.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마법사신가요?”


“아. 사정상 이런 행색을 하곤 있지만 마법사는 아니야. 마법엔 별로 재능이 없거든.”



라비는 좀 전의 건달들은 자신이 가진 장비들을 노리고 온 도적이라며, 자칫 홀랑 빈털터리가 되었을 거라고 몇 번이나 가슴을 쓸어내리며 과하게 호들갑을 떨었다. 사례를 하고 싶은데 혹시 괜찮겠느냐는 말에 알렌은 속으로 조용히 쾌재를 불렀다. 사실 예전 같았으면 몇 번이고 거절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깟 체면 차릴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 알렌이 본론을 꺼냈다.



“사실 지금 성검이 필요한데 3파운드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아서…….”


“아하. 보아하니 성기사?”



라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금방 나뭇가지 끝에 묶인 짐 보따리를 풀었다. 과연 무기상의 말마따나 신기한 장비들이 잔뜩 있었다. 금으로 된 활부터 시작해서 용의 어금니로 만들어진 스태프, 그리고 온갖 번쩍거리는 장신구까지. 이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고도 여태껏 도난당하지 않은 게 용하다. 아니, 그 전에 어찌 저 작은 보따리에서 이토록 많은 물건이 나오는 걸까. 쭈그려 앉아 탄복하는 알렌에게 라비는 십자모양으로 크리스탈이 화려하게 수놓인 장검 하나를 꺼내놓았다.



“자고로 좋은 성검이란 검사의 신성력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가에 달렸지. 이정도면 사용감이 나쁘지 않을 걸.”



검을 시험 삼아 휘둘러보는데 상당히 가볍고 날렵하게 공기를 가르는 것이 퍽이나 알렌의 마음에 들었다. 라비는 본래 30만 파운드가 넘는 녀석이지만 알렌에게는 단돈 3파운드만을 받겠다고 했다. 그의 호의에 감동한 알렌은 전 재산을 흔쾌히 지불했다. 그래, 어차피 돈은 일감을 얻어서 벌면 된다. 검만 있으면 몬스터를 잡아 가죽을 손질하여 파는 것 쯤 알렌에게 별 거 아니었다.







2. 신성함은 역린과도 같이



여기까지 설명했을 때 혹자는 어째서 불유쾌한 첫 만남이었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잠자코 이 이야기를 계속해야 한다.



마른 볏짚 위에서 하룻밤을 지새운 다음 날, 일자리를 찾아 시가지를 헤매던 알렌은 ​가고일의 뿔을 구해오면 보수를 두둑하게 챙겨주겠다는 마을 대장장이의 거래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락했다. 웬만한 실력자가 아닌 이상 그 단단한 가죽에 흠집 하나 내지 못하고 당한다고들 하지만 드래곤 토벌 경험마저 있는 알렌에게 가고일 사냥쯤이야 늑대 잡이나 마찬가지였다.



허나 대장장이는 모험가라기엔 곱상하고 사냥꾼이라기엔 수수한 행색인 그가 영 믿음직스럽지 못한 모양이었다. 길을 떠나기 직전까지 내내 못마땅한 기색으로 훑어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알렌은 뺨을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하기야 누가 이런 외지인에게 일을 맡기려고 들까. 보란 듯이 사냥에 성공해보여야겠다고 의욕에 차 주먹을 꼭 쥐었다. 그렇게 자금이 확보되고 나면 그는 다른 마을로 이동할 심산이었다. 오래 두류해봤자 추격자들한테 들킬 가능성이 클뿐더러, 엄밀히 이 마을에서만큼은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한 무리의 가고일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면서 알렌이 천천히 때깔 좋은 새 성검을 빼들었다. 마치 성난 고양이가 울부짖는 것 같은 가고일의 째진 울음소리가 귓전에 때려 박혔다. 검 끝에 신성력을 모으자 그에 응답하듯 성스러운 기운이 일렁거리며 차오르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으르렁거리던 가고일 떼가 동시에 알렌에게 아가리를 쩍 벌리고 달려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알렌은 눈 하나 깜빡거리지 않고 왼쪽 발을 축으로 하여 단단히 자세를 잡은 후 검을 휘둘렀다. 그러면 난폭한 검기가 하얀 불길처럼 치솟으며 단숨에 가고일들을 베어버려야 했다.




“……어?”




허나, 검기는 발산되지 않았다. 알렌이 당황해서 눈을 휘둥그레 뜬 사이 가고일 한 마리가 목덜미 쪽으로 뛰어오르기에 황급하게 막았다. 사방에서 덤비는 녀석들을 발로 차내고 다시 검을 휘둘러봤지만 여전히 일편의 변화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고일의 단단한 등껍질에 튕겨져 나가는 일반적인 검일뿐이었다.



혹시 상처 치료에 전념하느라 신성력을 다 써버린 걸까? 아슬아슬하게 방어하는 동안 무리한 격전으로 인해 약해진 칼날에는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가고일의 독 맺힌 발톱이 알렌의 어깻죽지를 스쳤다. 윽, 살점이 할퀴어지는 고통에 입술을 잘근 깨물며 연이은 공격을 검으로 후려쳐내는 순간이었다. 흡사 유리가 깨지듯 검이 눈앞에서 그야말로 산산이 조각나 버린 것이다. 칼날은 잘게 부서진 가루가 되어 반짝반짝 흩날려가고, 그대로 굳어버린 알렌은 경악스럽게 자루밖에 남지 않은 제 검을 바라보았다.



그때는 생각을 담당하는 영역이 모조리 증발해버려서 뇌중에 단 한마디밖에 떠오르지 않더라.




“이……, 이, 사기꾼……!”




하고 말이다.






3. 호박과 양피지 그리고 향신료



알렌이 잔뜩 흥분한 가고일 무리로부터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무작정 도망치다가 발을 헛디뎌 절벽에서 굴러 떨어졌는데, 다행히도 아래에 얕지 않은 강이 있었던 것이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숲을 나온 그는 옷의 물기를 짜내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반드시 그 빌어먹을 사기꾼을 잡아 떼인 돈을 받아내고 마리라고. 두 눈에 이글이글거리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라비는 한 곳에 길게 머무르지 않았으며 거기에 여기저기 목격담을 뿌리고 다녔다. 마을 회관, 식당, 서점, 그리고 악세사리샵을 차례로 들렸다가 줄줄이 허탕치고 나오면서 어쩐지 알렌은 지금 라비의 장난에 휘말리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기묘한 음모론에 빠졌다. 단순히 활동량이 많다기엔 마치 꼭 약이라도 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알렌이 마침내 라비를 발견한 것은 그가 낚시를 하러갔다는 동네 집배원의 말을 듣고 연못을 찾아갔을 때였다. 못 다 진 해가 밤하늘에 뉘엿뉘엿 흐려지고 있었으며 거리는 채도가 선명한 노을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라비는 연못가 그루터기에 앉아 있었다. 알렌이 욕지기라도 내뱉을 기세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는데, 왜인지 옆에 작은 꼬마 아이 하나가 함께 있어서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오르골을 소중하게 손에 쥔 아이에게 라비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가 즐거운 듯 까르르 웃자 라비 역시 마주보며 웃어주었다. 노을이 너무 찬란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멍해지고 기분이 이상했다. 오르골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낡고 오래된, 허나 한때 분명 아름다웠을 선율이 귓바퀴에 휘감겨왔다. 라비는 아이에게 선뜻 오르골을 가지라고 말했다. 아이가 폴짝 뛰며 기뻐했다.



알렌은 아이가 떠난 후에야 라비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어제 당신이 팔았던 성검에 대해 할 말이 있노라는 몇 번의 부름에도 라비가 무시로 일관하자 약간 울컥해서 다소 억세게 어깨를 잡아챘다. 라비는 눈을 꿈뻑거리며 알렌을 올려다보았다. 사기꾼의 표정이라곤 실로 믿기 힘들 만큼 결백한 얼굴이었다. 




“그쪽도 상대하기 귀찮아 보이니 본론만 말할게요. 3파운드 돌려주세요.”


“그 돈은 아까 밥 먹느라 썼는데.”




그리고 나는 가짜는 취급 안 해. 그렇게 말하면서 라비는 어깨를 으쓱거리기까지 했다. 그 능청스러움에 알렌은 어이가 없어졌다. 낚시에 열중하고 있는 라비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그 가짜 성검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구구절절 설명했다. 그 말을 듣는 내내 라비는 연신 하품만 했다.




“당신, 도굴꾼이죠? 그 지팡이도 본인 게 아니라 훔친 거라서 마법 못 부리는 거 아녜요?”


“어허. 말을 좀 심하게 하네. 나는 평범한 수집가래도.”


“그럼 왜 못 부려요?”


“가업 비밀이야.”




라비는 탁월하게 요리조리 대화의 요지를 피하고 있었다. 애초에 한 점의 부끄럼 없이 떳떳하더라면 이렇게 논점을 흐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쯤 되니 알렌의 참을성에도 슬슬 바닥이 드러나고 있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지만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이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은 모양인지 라비는 계속해서 뻔뻔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도리어는 그쪽 신성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고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얼굴에 잔뜩 열이 올라 상기된 알렌이 무어라 말하려고 입을 떼는 순간, 뺨으로 날카로이 벼린 어떤 것이 스쳤다. 가늘게 상처가 그어진 뺨을 무심코 매만졌다가 오싹해졌다. 화살이었다.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이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알렌은 무의식적으로 라비를 보호하기 위해 팔을 뻗었고 라비는 제 소중한 짐 꾸러미를 챙겨들었다. 이윽고 교회의 추격자들이 일사분란하게 그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알렌은 그제야 이 마을에서 너무 오래 시간을 지체했다는 사실에 아차했다.




“거기 붉은 머리, 당신은 죄인 알렌 워커와 무슨 관계지?”


“……죄인이라고?”




라비가 황당한 눈으로 알렌을 쳐다보았다. 알렌은 진땀만 삐질삐질 흘리고 있을 뿐 이렇다 할 변명이나 항변을 하지 않았다. 무슨 사정인지는 알 수 없어도 더 이상 얽히면 뭔가 위험해질 것 같은 냄새가 났다. 라비가 대답을 하려는데 알렌이 말을 가로채고 대뜸 외쳤다.




“이 사람은 공격하지 말아주세요!”




그 목소리가 어찌나 절실하게 들리던지, 출중한 연기력에 라비는 하마터면 알렌에게 감동할 뻔 했다. 뒤에 이어지는 말만 아니었더라도 말이다.




“이 사람은 제 죄완 전혀 상관없는, 그저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부디 이 사람만큼은!”




……그 얘기를 듣고서 기사단이 라비를 곱게 돌려보내줄 리가 없었다. 예리한 검 끝이 순식간에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보고 라비는 기겁하여 완드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이 치사한 백발 녀석, 이렇게 복수를 하는 구나! 속으로 눈물을 찔끔 흘렸다.






4. 아아, 굽어 살피소서



일명 물귀신 작전이다. 적어도 혼자 죽지는 않겠다는 거다. 그렇게 안 생겨서 의외로 음흉한 수작을 다 쓴다. 라비가 팔을 휘휘 저어가며 아니라고 강력한 부정의 의사를 표현했지만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기사단은 일제히 공격을 실행해왔다.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숲 속으로 도망치면서 라비는 알렌에게 언성을 높였다. 왜 교회의 기사단이 널 쫓는 거야, 죄인은 또 무슨 소리고! 정신없이 달리는 와중에 설명하자니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알렌은 그냥 비밀이라고 버럭 일갈했다. 그러자 라비가 입술을 삐죽이며 의외로 뒤끝이 있다고 중얼거렸다.



얼마나 그렇게 뛰었을까. 체력이 떨어져 헉헉, 가쁘게 호흡하는 라비의 움직임이 확연히 느리고 힘겨워졌다. 나무를 짚고 잠깐 숨을 돌리는데 알렌은 지치지도 않았는지 지체할 시간이 없다면서 억지로 손을 잡아끌었다. 알렌을 따라 겨우겨우 걷던 다리에 힘이 풀려 라비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 더는 못 뛸 것 같았다. 라비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니까 알렌이 무릎을 꿇고 등을 보여주었다. 그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 한참이나 멍하니 쳐다봤다.




“업혀요. 못 뛰겠다면서요.”


“……네가 날? 왜?”


“그러면 혼자 도망쳐요?”




그렇다곤 해도 너무 상냥한 거 아니냐고……. 터무니없는 이유에 라비가 어버버거리는 사이, 어느 새 추격자들이 뒤따라왔다. 이제 정면승부를 하지 않는 이상 달아날 길은 없었다. 저 녀석들은 자신이 어떻게든 처리할 테니 그 틈에 혼자 도망갈 궁리하지 말라는 알렌의 선전포고에 라비는 잠깐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검과 창을 든 기사 수십 명이 한꺼번에 알렌에게 달려들었다. 알렌은 무기 없이도 훌륭한 전투를 선보였다. 몸을 숙여 공격을 피하고 손목을 내리쳐 검을 떨구게 만들었다. 가까이 붙은 기사의 옆구리를 걷어찬 다음엔 빼앗은 검으로 날아오는 화살들을 튕겨냈다.



실력의 차이가 확연하여 제법 일방적인 싸움이었으나 워낙 적의 머릿수가 많은 게 문제였다. 앞을 방어하면 뒤가 비니 결국 그 허점을 찔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면에서 휘둘러오는 검과 겨루는 사이, 쓰러져있던 기사 한명이 기어코 일어나 알렌의 등을 창으로 찔렀다.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깊게 쑤셔지지는 않았지만 살갗이 찢기는 고통이 선연하게 느껴져서 알렌은 큭, 하고 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다가 돌부리에 발꿈치가 걸려 그만 넘어졌다. 엉덩방아를 찧는 그 찰나가 어찌나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느껴지던지. 뇌리가 새하얘지며 허망하게 고개가 들렸다. 그대로 머리를 내리치는 칼날을 마주치고 알렌이 겁에 질려 눈을 질끈 감는 순간, 흙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것에서 돌연 새빨간 불길이 치솟더니 그들의 주변을 휘감았다. 아니, 단순한 불길이 아니었다. 활활 타는 화염으로 이루어진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은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오르는 듯싶다가 방향을 바꾸어 이쪽으로 하강했다. 기사들이 식겁하며 바닥을 기어 피하려고 했으나 아가리를 크게 벌린 화마에 삼켜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알렌은 힘없이 주저앉은 채 식은땀을 흘리면서 그 모습을 그저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라비가 알렌에게 완드를 짚으며 다가왔다. 이윽고 내밀어진 손을 잡지 않고 올려만 보던 알렌은 의문을 감추지 못해 결국 조심스레 물었다.




“마법, 못 쓴다고 하지 않았어요?”


“고수는 원래 실력을 숨기는 법이야.”


“허.”


“어쨌거나 얼른 일어나. 이 틈에 도망가야지.”




결국 그는 라비의 손을 맞잡았다. 크로노베리에서의 사건은 대강 이렇게 일단락된다.



다음 마을로 가기 위해 산을 건너는 내내 라비는 조잘거리며 알렌에게 동행하자는 요구를 해왔다. 내걸은 조건은 동행하는 기간 동안 전설의 성검을 빌려주는 것이었다. 기실 말로만 전설이지 알렌은 이름조차 생소한 유적이더랬다. 다만 무척이나 영험한 물건임은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도파엔 제련된 아다만티움이 크게 박혀있었고 화려한 검환 장식은 마치 그리폰을 연상시켰으며 룬문자가 칼날에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거반 알렌의 몸집만한 대검이었으나 몹시 가벼워 한손으로 들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입 벌리고 감탄하다가 아차 싶어서 냉큼 내려놓았다. 성검을 새로 구하긴 해야겠는데 가진 돈은 없으니 거기에 귀가 팔랑팔랑거리는 건 당연지사였다. 일편의 양심만이 이성을 촉구하며 거절하라고 알렌의 귓전에서 외치고 있었다.




“네가 진짜 팔라딘이라면 이 정도는 쓸 줄 알아야겠지.”


“……이거 어디서 난 거예요? 훔친 건 아니죠?”


“교회에 왜 쫓기는 지 말 안 해주는 이상 나도 대답 안 해.”


“그렇다면, 동행은 갑자기 왜요?”




전보다 한결 경계를 푼 듯한 알렌의 표정을 보곤 라비가 기분 좋게 싱글벙글 웃었다. 




“재밌는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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