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rite

[알렌라비] 달콤하지 않아











“추워…….”

이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한기에 몸을 바르르 떨며 가슴팍으로 두 손을 웅크려 붙이다가 불현듯 잠이 깬 것은 깊은 새벽이었다. 라비는 이불을 둘둘 만 채로 팔만 쏙 내밀어 머리맡에 있을 핸드폰을 더듬더듬 찾았다. 어둠에 익숙해져있던 그의 눈이 시리도록 환한 액정화면을 인식하기까지는 대략 5초 정도 소요되었다. 3시 5분. 아직 알람이 울리려면 한참 남았다. 더 잘 수 있을 거라 안도하며 비몽사몽 돌아눕는데, 옆에서 자고 있는 알렌의 기색이 어쩐지 이상했다. 뭔가 지독한 것에 시달리는 듯 미간이 괴롭게 일그러져 있었고 주먹을 꽉 쥔 손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던 것이다. 당황한 라비가 급히 흔들어 깨우자 그는 잠시 뒤척이더니 이내 두 눈을 느리게 꿈뻑꿈뻑거리며 떴다. 그리곤 가만히 눈동자를 굴려 라비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얌전하다기엔 기가 한풀 죽어보여서 라비는 찬찬히 그의 창백한 안색을 살폈다. 

“뭐야, 어디 아파?”

“아뇨, 그냥…… 악몽을 꿔서.”

알렌의 뻗친 머리카락을 슥슥 정돈해주던 라비가 스탠드를 켜고 일어나 차가운 물 한잔을 따라왔다. 알렌은 조금 놀란 후에 죄송해요, 하고 멋쩍게 웃으며 받아든다. 죄송할 게 뭐 있다고. 알렌은 종종 이런 식으로 남의 호의를 에둘러 받고는 한다. 그러니까 라비는 그가 다소 못돼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베개를 품에 안고 알렌이 목을 축이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전체적으로 가느다란 옆선이라든지 하얗고 길쭉한 손가락, 혹은 그와 대비되는 굵은 목울대가 크게 움찔거리는 모양 따위. 성적인 감흥보다는 감탄이 먼저 들었다. 과연 흠 잡을 데 없이 잘생긴 녀석이다. 그러다가 알렌과 눈이 마주쳐서 라비는 괜히 하품을 하며 졸린 체 했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상태로 가만히 있으면 수납장 위에 컵을 내려놓은 알렌이 라비를 따라 옆에 조심스레 누웠다.

“죄송해요, 라비. 주무세요. 스탠드 끌게요.”

“그만 죄송해하고 너도 얼른 자.”

라비가 알렌의 등을 일정한 박자로 토닥토닥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손길에 알렌이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실제로 아이를 얼러본 적은 없었으니 어설프기 그지없는 솜씨였으나, 신기하게도 정말로 긴장이 풀리고 발끝에서부터 점점 안정되어가는 것 같았다. 아니, 그냥 라비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까치집이 되어 코앞에서 배시시 웃고 있는 그의 존재는 솔직히 조금 현실감 없을 정도로 기뻤으니까.

동거는 알렌의 제안이었다. 브리스톨에서 전세를 들어 살고 있던 라비의 계약기간이 끝나게 되면서 이사를 준비하던 와중에, 알렌이 집을 구할 때까지 잠시 함께 사는 건 어떠겠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라비는 그 말을 하고 난 뒤 알렌의 묘한 침묵을 느꼈다. 그가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챈 건 그의 손끝이 한참동안이나 테이블 위에서 초조하게 꼼질거렸기 때문이다.

‘글쎄. 굳이 그래야 하나?’

‘네에…….’

시무룩하게 꼬리를 축 늘어뜨린 알렌이 입술을 삐죽이다가 애꿎은 빨대로 프라푸치노의 휘핑크림을 콕콕 쑤셔댔다. 누가 봐도 단단히 심통이 난 모습에 라비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아야했다. 그런 알렌을 놀리는 건 꽤나 재밌는 일이지만, 더 이상 가다간 자칫 미움을 받을 지도 몰랐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라비가 티라미수를 권유하자 알렌은 말 없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오래 사귀다 보니 알렌 워커가 먹을 걸 사양하는 일도 다 본다. 속으로 유쾌해하며 라비는 아메리카노를 쪼옥 빨아들이고 핸드폰 메신저를 확인한 후 여전히 뽀로통한 알렌에게 태연히 물었다.

‘아예 같이 살면 안 돼?’

“이삿짐은 내일 온대.”

머리카락의 물기를 수건으로 털어내며 식탁에 다가갔을 때 알렌은 잘 구워진 팬케이크를 그릇에 덜고 있었다. 적당히 폭신한 빵 위에 생크림과 시럽을 얹고 마지막으로 딸기를 올려 장식했다. 퍽 훌륭한 아침식사로 보였다. 다른 요리는 못해도 팬케이크는 자신 있다더니 그 말이 허세는 아닌 듯하다. 라비가 우와, 작게 중얼거리고 의자를 빼어 자리에 앉았다. 노릇노릇하고 달콤한 냄새가 솔솔 났다.

“커피 드실래요? 아니면 홍차?”

“나는 커피로.”

“알겠습니다.”

알렌이 그라인드된 커피를 필터에 털어 넣고 예열된 머신을 작동시켰다. 커피가 잔에 쪼르르 드랍되는 것을 멀뚱멀뚱 구경하던 라비는 문득 그가 본래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다는 걸 기억해냈다. 성격상 단순히 폼으로 이런 고급 원두커피머신을 사놓지는 않을 테고. 의문에 빠지려는 찰나 알렌이 먼저 대답했다.

“아, 이거 얼마 전에 샀어요. 라비가 오면 필요할 것 같아서.”


이 ​무슨 혼수 장만하는 신혼부부 같은 대사란 말인가. 라비는 팬케이크를 잘라 한입 쏙 물다가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 했다. 과연 알렌은 라비가 들어와 사는 것을 대단히 기대하고 있던 모양이다. 여태까지 혼자 살았다기엔 모든 물건들이 대부분 두 개씩 알맞게 구비되어 있었으므로, 라비는 자신이 오기 전 그가 일부러 사다 챙겨놓았으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지금 라비가 들고 있는 포크는 손잡이 부분에 앙증맞은 토끼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알렌이 귀엽지 않느냐고 싱글벙글 했다. 눈이 하도 반짝반짝 빛나서 별이라도 박힌 것 같다. 알렌은 말로든 표정으로든 워낙 감정에 솔직한 부류인지라 항상 이러한 상황에서 민망해지는 것은 도리어 라비였다. 어련하겠냔 눈빛으로 쳐다보던 라비가 헤벌레 웃고 있는 알렌의 볼을 아프지 않게 살짝 꼬집었다. 알렌은 아야,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기분 좋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나중에 저 대학원 과정 마치고 나면 더 큰 집으로 이사 가요. 굳이 영국이 아니어도 좋고.”

“우리가 그때까지 연애하고 있을 거란 자신감 대단한데?”

“라비도 싫진 않잖아요.”

라비는 거기까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딴청 부리면서 알렌이 내려준 커피를 홀짝였을 뿐이다.











식사를 마친 후 설거지까지 끝내고 나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학업으로 바쁜 알렌과 달리 프리랜서인 라비는 특히 요즘과 같은 비수기라면 그저 소파에 누워 빈둥대는 것만이 하루의 일과였다. TV를 틀어 영화 상영관에서 아무 VOD나 골라 재생시켰다. 무난한 액션영화였다. 시작한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시원시원한 액션씬이 나오길래 금방 심취하여 보다가 스토리가 이해되지 않아서 빠르게 흥미가 떨어졌다. 라비는 하품을 하고 작게 눈물 맺힌 슥 비볐다. 자신이 잠이 많은 건 잠을 자는 것 말곤 그다지 할 게 없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졸린 눈으로 알렌을 슬쩍 훔쳐보았다. 노트북으로 과제를 하는 모습이 꽤나 열심이었다. 아무리 지루하다고 해도 그걸 굳이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서 라비는 한참 구경하며 발끝을 까딱까딱거렸다.




“나 방 구경해도 돼?”


“네, 물론이죠.”




알렌은 의외로 흔쾌히 허락했다. 뭐, 숨길만한 건 없는 모양이다. 뭔가 집의 구조를 눈에 익혀두고 싶기도 하고 그동안 알렌이 혼자서 어떻게 지내왔는지도 궁금했다. 지극히 라비의 기준으로 봤을 때 그는 인생을 썩 재미없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술자리도 싫어하고 스포츠나 게임을 즐기지도 않는데, 평소엔 대체 뭘 하면서 지내는 건지 가늠도 안 됐다. 슬슬 쫑긋거리며 호기심이 동하기 시작했다.



거실을 나가면 복도가 있고 복도는 세 개의 방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알렌의 방이며 하나는 서재, 그리고 남은 하나는 창고로 쓰다 라비를 위해 비워둔 참이라고 했다. 알렌의 방은 이미 지난 밤 실컷 구경했고 빈 방은 덩그러니 시계가 걸려있는 것을 제외하면 정말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라비는 자연스럽게 서재로 발걸음 하게 되었다. 촌스러운 서체로 <WELCOME>이라고 적힌 팻말이 걸린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말이 서재지, 쓰임새는 창고와 거의 다를 바가 없다는 게 첫 감상이었다. 잡동사니들이 방구석 한 편에 쌓여 있었고 손 안 댄지 오래되어 보이는 책장에는 알렌과는 일절 어울리지 않는 철학이나 인문학 관련 서적으로 빼곡했는데, 책등만 봐도 너덜너덜 낡아보였다.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타입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방을 빙그르르 둘러보던 중에 문득 가장 아래 칸에 꽂혀 있는 앨범이 눈에 들어왔다. 나름대로 정돈이 잘 된 다른 물건들과는 달리, 대충 아무렇게나 끼워 넣어 삐죽 튀어나온 그것이 제법 최근까지 알렌의 손을 타보였던 것이다. 알렌이 거실에 제대로 있는지 확인한 후 라비는 약간 콩닥대는 기분으로 쭈그려 앉아 앨범을 꺼내 펴보았다. 



첫 장은 알렌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했다. 멀쩡하게 브이를 하고 찍은 건 없었고, 대부분 간식을 먹고 있거나 울고 있는 사진이었다. 잘 나왔다기보다는 그 상황의 우스움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느낌이 들어 라비가 쿡쿡 웃었다. 그중 막대사탕을 한쪽 볼에 가득 차게 물고 눈물방울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올려다보는 사진은 조금 가지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마치 일상의 모든 순간을 사진으로 남겨놓겠다는 듯 정성스레 기록된 장면들에 라비는 약간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사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알렌의 아버지는 분명 다정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알렌도 그를 닮아 힘든 환경 속에서도 바르게 자랄 수 있었으리라.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알렌이 겪었을 비통함을 감히 이해 하려한다는 것은 끔찍하리만큼 죄스러운 일이었으므로 라비는 이때쯤 고개를 저어 생각을 끊어냈다. 그저 알렌 워커라는 사람이 걸어온 길을 묵묵히 존경하기로 했다. 허나, 그러한 감동은 라비가 다음 장을 넘기는 순간 곧장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그 뒤의 페이지는 온통 자신의 사진으로 즐비했기 때문이다.



바닷가나 꽃구경을 갔을 때 찍은 기념사진 정도를 모아두는 거야 뭐 그럴 수 있다고 친다. 그렇지만 라비가 경악한 것은 강박증을 방불케 하는 알렌의 음습함에 있었다. 그간 찍은 사진들이 한 치의 과장 없이 몽땅 인화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단체사진의 경우에는 라비만 깔끔하게 오려져 있었다. 거기에 상의를 벗은 상태로 쿨쿨 자고 있는 얼굴은 본인조차도 언제 찍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순 라비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 같은 죄책감 혹은 공포감에 압도되었다.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쳐서 그대로 앨범을 닫아 제자리에 꽂아두고 냉큼 서재를 나왔다. 핏기 가신 얼굴로 얌전히 소파에 착석하자 알렌이 고개를 돌려 먼저 말을 걸었다.




“뭐 구경 했어요?”


“어? 아니, 아무 것도…….”











나른한 오후에 띵동띵동 초인종을 울리며 손님이 도착했다. 택배였다. 반질반질한 원목으로 된 새 옷장으로 얼마 전에 라비가 주문한 것이다. 전에 쓰던 옷장은 붙박이라서 이사 오는 참에 새로 장만했다. 택배원 두 명이 직접 라비의 방 가장 알맞은 곳에 옷장을 옮겨주었다. 텅 비어있던 방이 이제 그나마 제 것 같이 느껴졌다. 이 기회에 책상도 하나 살까? 침대는 갑자기 바뀌면 어색하니까 역시 원래 쓰던 걸 쓰는 게 좋겠지? 그 말에 가만히 있던 알렌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침대 가져오려구요?”


“안 그럼 어디서 자?”


“제 방에서 같이 자면 되죠.”




오늘처럼.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능청스레 그런다. 알렌 본인은 진심으로 한 말이겠지만 라비가 듣기엔 그저 어린애가 부리는 억지여서 허허 웃어 넘겼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러니까 알렌이 금세 토라진 표정을 짓는 거였다. 제 딴에도 그 얼굴에 라비가 약하다는 걸 아는 모양이었다. 좋은 말로 잘 타일러야지, 뭐 연하의 연인을 사귀는 이상 이 정도 성가심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너는 어려서 가능할지 몰라도 나는 슬슬 무리라고.”


“……이상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잠깐, 정적이 감돌았다. 얼음 상태가 되어서 라비는 눈만 깜빡깜빡 알렌을 쳐다보았다. 입을 약간 벌리고 너무 당혹한 나머지 얼굴 근육의 긴장이 풀어져있는, 예의 멍청한 표정이다.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삐친 연기를 하던 알렌은 그런 라비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지 그만 바들바들 떨다가 결국 푸핫 웃어버리고 말았다. 알렌이 배를 부여잡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니 라비의 얼굴이 뒤늦게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귀 끝까지 열이 오른 채 하는 말은 의도치 않게 더듬거려지는 바람에 다소 우스꽝스러웠다.




“그, 그야 네가 말을 이상하게 했으니까……!”


“알겠어요, 그럼 제대로 말할게요. 제 침대에서 같이 자요. 더블 사이즈로 바꾸면 문제없죠?”


“문제 완전 많거든!”




라비가 끝내 바닥을 퍽 차고 씩씩거리며 방을 나가자 웃음을 그친 알렌이 눈꼬리에 고인 눈물을 닦아낸 후 서둘러 그 뒤를 따라나섰다. 그러나 주변을 알짱거리면서 살랑살랑 회유하는 목소리에는 아직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웃어서 미안해요, 라비. 그치만 같이 안 자면 그게 무슨 동거예요. 절대 무리 안 시킬게요. 네? 시끄러워!














'writ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렌라비] 은총이여 오라  (0) 2018.01.29
[알렌라비] 공생 2  (0) 2018.01.16
[알렌라비] 음험한 것을 논한다면  (0) 2017.12.25
[알렌라비] 찬란한 이름으로  (0) 2017.12.14
[알렌라비] 비밀과 거짓말  (0) 2017.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