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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라비티키] 공생 ※에서 이어집니다 가주를 잃은 워커 가문은 그의 양자인 알렌 워커를 새로운 수장으로 순조롭게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출신도, 핏줄도 밝혀진 바 없이 정치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스물의 청년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완벽히 가주의 모든 일을 수행했다. 신사업 재개 후 나폴리의 마피아 세력과 손을 잡은 그가 본격적으로 몰락 직전의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제일 먼저 떠올린 일은 유능한 지략가를 스카웃하는 것이었다고. 글쎄 말이 스카웃이지, 사실상 납치나 다름없다고 라비는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 집에 진짜 술은 없는 거야?” “말하지 않았던가요? 주류 따윈 일절 두지 않습니다.” 긴 테이블에 알렌과 마주 앉은 라비가 내키지 않는 비프스테이크를 칼질했다. 천장의 샹들리에, ..
[알렌라비] Trick or Favor 라비가 맨 처음 알렌에게 가졌던 선입견에 견주어 볼 때 가장 의외인 점은 바로 그가 생각만큼 썩 순진하지는 않더라는 것이었다. 앳된 얼굴과 공손한 말씨, 어리숙할 정도로 무른 성격이라든지. 또 놀리면 즉각 반응하는 모습이 재밌었으니까 그게 못내 치기 어린 애송이로만 보였던 것 같다. 뭐, 어디까지나 첫인상에 대한 얘기다. 이후 함께 다니면서 깨달은 것인데 알렌은 확실히 다정했지만 아둔하게 굴지는 않았고 오히려 다소 음험했으며 나이에 비해 조숙했다. 물론, 여러 가지 방면에서. 라비가 가장 최근 그 사실을 재인식하게 된 건 두 사람이 임무를 함께했던 보름 전이었다. 그들이 파견된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은 투우와 플라멩코의 기원지였고 시기적절하게도 그때가 하필 축제기간이었던 것이다. 관광객 인파에 휩쓸려 길..
[알렌라비] 해의 그림자 3 11. 그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비교적 나아진 것은 없었다. 학교생활도, 주위의 시선도, 그리고 라비와의 관계도. 원래부터 빈말로라도 썩 친밀하다곤 말 못 할 두 사람이었다. 타인의 약점을 곧잘 간파하는 라비와 쉽게 도발에 넘어가는 알렌은 그다지 궁합이 좋지 않았던 탓이다. 요사이 그 아슬아슬함으로부터 무언가 터진 것 같았다. 하인들은 자세한 사정을 알지는 못했지만 적잖이 걱정스러웠다. 눈에 띄게 냉랭해진 분위기. 라비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는데 문제는 알렌이었다. 가급적 라비와 마주치는 것을 피했고 거북해했으며 조금이라도 화제를 꺼낼라치면 험악해졌다. 그 인간에 대해서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딱 잡아떼니 더 이상 추궁할 수도 없어서 하인들은 결국 조르르 라비에게 토로하기 시작했다. 입을 모아..
[알렌라비] 해의 그림자 2 6. 미사는 내내 지루했다. 두 손을 모으고 중얼중얼 기도문을 외는 자들 사이에서 알렌은 반쯤 넋을 놓고 있었다. 여기 있으면 멀쩡하던 사람도 금방 무언가에 홀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적응되지 않는 엄숙한 공기에 괜히 여러 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이 지긋한 신부가 연신 강요하는 믿음이니 은총이니 하는 것엔 영 관심 없었고,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미사가 끝나고 나면 라비에게 안타깝지만 당신의 전도는 실패였노라고 말해줄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새하얀 사제복을 입은 라비가 성경 강독을 위해 단상 앞에 서자 알렌은 그러한 의욕을 상실하고 멍해졌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진중한 자태로 전하는 신의 전언들. 라비의 목소리는 일관된 높낮이였으며 듣기에 거슬림이 없었다. 그건 정말 나무랄..
[알렌라비] 모럴 컴플렉스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알렌라비] 빈 잔 알렌은 자정을 조금 넘어서 펍에 도착했다. 라비가 핸드폰의 배터리를 분리한 지 정확히 한 시간 만이었다. 숨을 가쁘게 내쉬며 다가온 알렌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으로 잠깐 라비를 내려다보았지만 이윽고 묵묵히 맞은편에 의자를 빼 앉았다. 그는 일절 술을 하지 않는 사람이므로 이런 자리가 낯선 것 같았다. 바싹 긴장하고 자꾸 손을 떨었다. 왼손을 떨면 오른손이 잡지만 그게 쉬이 진정될 리 없었다. 술기운에 반쯤 감긴 눈을 느리게 꿈뻑이면서 라비는 알렌에 대해 생각했다. 상냥함과 온유함, 배려, 희생 그리고 불안과 음울. 그에게선 극단적인 개성들이 위태롭게 교호했으며 그런 방식으로 스스로를 좀먹고 있었다. 밥은……. 먹었어. 라비가 짧게 대꾸했다. 지금 먹지 않았다고 한들 같이 식사나 할 처지는 아..
[알렌라비] 신이 말하는 대로 ‘인간을 취하되 결코 사냥하지 마라.’ 마족으로 살면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었다. 그 의미가 갖는 모순에 대해서 라비는 몰이해했지만 딱히 주어진 불문율을 거스른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면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것이 40년 정도 된 어머니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인간은 우리의 식량이며 그만큼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고. 라비에게 삶의 귀감이 되어준 두 개의 문장은 형태는 달랐으나 대충 비슷한 느낌이었다. 요컨대, 마족이 인간의 우위임에 근간한 말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에는 한 치의 오류가 없어보였다. 좁은 창문 사이로 드는 달빛에 먼지가 나풀거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라비는 작게 재채기했다. 으슬으슬 한기가 도는데 보온할 만한 것이 없어 더욱 몸을 웅크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알렌라비] No Thanks Life 남자의 올화이트 정장에서는 짙은 향수 냄새가 났다. 추측하건대 파코 라반의 원 밀리언. 애송이치고는 제법 독한 것을 쓴다는 게 녀석의 첫인상이었다. 기껏해야 십대 후반,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았을 앳된 얼굴은 세상만사의 더러움과는 일절 무관해보였으니까 라비는 그 점이 수상했다. 온갖 추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곳은 도시의 찬란함 뒷면에 숨어 있는 그림자 구역이었다. 모럴이 무너지고 눈이 멀어 더욱 본능적이고 자극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들. 범람하는 허무와 채워지지 않는 갈증 가운데 품위라곤 찾아볼 수 없었으며 대부분 취해있거나 죽어가거나 둘 중 하나였다. 면전의 남자는 과연 어느 쪽일까. 입에 대고 있던 술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라비는 남자와 눈을 가만 마주쳤다. 남자의 완만한 눈매는 충분히 부드러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