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렌라비] 턴어라운드 5 간밤의 정신적 피로가 누적되어서인지 머리는 수면부족으로 지끈거리고 있었으나 6시가 되자 습관처럼 눈이 떠졌다. 알렌은 성인 남성이 눕기엔 비좁은 소파 위에서 뻐근한 아침을 맞이했다. 어둠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고 새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오늘 같은 날은 조금 더 자도 되지 않을까. 그냥은 일어나고 싶지 않아 늦장을 부리다가 문득 ‘오늘 같은 날이 뭔데?’하고 자문해보았다. 그건 오히려 스스로를 나약하게 만드는 말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의 자기연민에 빠지기는 싫었으므로 결국 끄응, 자리에서 일어난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어쨌든 부지런히 커튼을 걷고 어질러진 거실을 치웠다. 방문을 열면 라비가 지난 새벽 침대 위에 눕혀놓은 모양대로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숙취가 심한 듯 종종 뒤척이며 잠꼬대로 앓는 .. [알렌라비] 턴어라운드 4 그대는 고통으로부터 숭고해졌고 나는 그 숭고함을 꽃처럼 꺾고 싶었소. 라비가 쓰는 문장은 수사로 점철되어 있거나 너무 현학적이라서 종종 알렌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첫 베스트셀러였던 《OWEN》 역시 그러했다. 그래, 어떤 문화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트라우마 세대의 암울함과 비천함, 그리고 허무맹랑한 욕망의 가장 적나라하고 아름다운 향유이자 권태였다. 그 말조차도 무슨 뜻인지 긴가민가했지만 어쨌거나 그것만이 라비의 글을 설명했다. 라비를 처음 만났던 날 알렌은 밤새워 《OWEN》을 읽었으며 일말의 오기로 이후 세 번이나 복독했으나 결국 그 구절이 세간에서 찬사를 받으면서까지 함의하는 바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물론 워낙 문학에는 무관한 체질인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저 일회독 하는 것만으론 이해할 .. [알렌라비] 턴어라운드 3 로망은 프랑스가 낯설 알렌을 위해 가이딩 해주겠다고 선뜻 말했지만 알렌은 그가 현재 얼마나 영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사양했다. 대신 기본적인 불어 회화 몇 마디가 정리된 메모지를 받았다. 흔한 인사말에서부터 긴급 상황 시의 도움 요청 매뉴얼까지 사려 깊게 적혀져 있었는데 그중 알렌이 가장 유용하게 사용한 것은 ‘얼마인가요?’와 ‘잘 먹었습니다’였다. 로망은 한 치의 여지없이 좋은 사람임에 분명했다. 다정할뿐더러 뛰어난 처세술로 원만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묘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알렌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로망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더라면, 지금보다 더 스스로가 구차하고 비참하게 느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간 로망의 배려 덕분에 여행은 순조로웠다. 지베르.. [알렌라비] 턴어라운드 2 운명적으로 만나 첫눈에 반해 사귀었고 누구나 부러워할 법한 멋진 연애를 했으며 권태기가 찾아왔을 땐 쿨하게 서로를 놓아주었다.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헤어진 연인 사이. 그래, 맞는 말이다. 그러나 라비와의 관계를 단순히 그렇게 일단락하기에는 조금 더 복잡하고 예민한 사정이 연루되어 있었다. 적어도 알렌에겐 그랬다. 라비의 첫 베스트셀러와 알렌이 즐겨 연주하던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제8번, 오후 두시 경의 베르가모트 향기, 그리고 마나의 죽음. 그 모든 것들이 라비를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알렌을 괴롭게 했다. 당시 그는 몹시 나약해져있었고 피아노 건반 위에 손가락조차 대지 못할 정도로 지독한 만성우울증에 시달렸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남을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때 .. [알렌라비] 턴어라운드 1 여행한다고 생각해. 지금 하는 일은 전부 내려놓고. 알렌은 한 번도 외국에 나가본 적 없지? 그렇게 말하는 리나리의 목소리가 상기되어 있었다. 워낙 다정한 사람이니까 줄곧 걱정하고 있었던 거겠지. 알렌은 미안함과 고마움의 인사를 따로 전하는 대신 그냥 가볍게 웃었다. 유명 항공사의 비즈니스석을 예매하겠다는 리나리를 만류하고 선편을 고른 그는 여행 가방을 챙기면서 문득 자신이 가진 것이 얼마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껏해야 칫솔 세트와 갈아입을 옷 몇 벌, 낡은 작곡노트, 그리고 지갑. 만약 피아노가 가방에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면 챙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정도면 일 중독이야, 하고 리나리가 또 잔소리를 할 테지만 그만큼 피아노는 알렌의 전부였다. 프랑스로 가는 이유는 단순했다. 이번에 사운드트랙 작곡을.. [알렌라비] 비밀과 거짓말 1. “글은 이제 쓰지 않는 건가요?” 물음은 단도직입적이었고 목소리는 완고했다. 눈빛은 직관적이었으며 금방이라도 꿰뚫을 것처럼 강렬했다. 그때 라비는 그것이 얼마나 독창적이고 압도적인 존재감인가에 대해 말없이 감탄하고 있었다. 단지 등장만으로 클럽 안의 들뜬 공기가 차분해지고 모든 이목을 그 자신에게 집중시킨 것이다. 물론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복장 탓도 있겠으나, 무엇보다 알렌 워커라는 사람이 가진 걸출함 중 하나가 바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재능이었으니. 라비의 외조부이자 선대 북맨의 말을 빌리자면 그 재능은 그를 더 난사람으로 만든다고 했다.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는 비교적 최근에야 깨달았다. 아무리 성가시게 굴어도 도저히 미워할 수 없다는 건, 그만큼 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제 편으로 만들.. [알렌라비] 소금 기둥 “이해할 수 없어요.” 알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일에 대해 괴로워하면서도 한사코 존중하려드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건 분명 스스로를 갉아먹는 일임에 틀림없으나 남자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모른 체 시침을 떼며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남자에게는 그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혹은 그 상냥함이 한 꺼풀 벗겨진 아래에 무엇이 있을지를 생각하는 것이 퍽이나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알렌은 드물지 않게 제 강박적인 희생심에 휘둘렸고 남자는 그 위선의 출처가 궁금했다. 알렌이 재차 말했다. 너무 불합리해요. 그 목소리는 마치 애원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남자는 잠깐 침묵했지만 가장 조심스러운 말을 고르기 위함은 아니었다. 단지 자꾸만 어긋나며 서로에게 닿질 못하고 제자리를.. [알렌라비] 메마른 봄 사랑한다, 알렌. 나의 소중한 아이야. 모든 기억은 그로부터 시작한다. 조작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불확실성, 태초의 선험적 이미지, 무너짐, 재구축. 그리고 죽음과 영원. 일련의 진리는 마치 백사장에 파도가 스미듯 진드근히 젖어들었다. 조각나있던 장면들의 경계가 흐려지고 하나의 그림으로 연결되는 그 지점에서 박사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알렌은 박사의 그러한 찬란함을 사랑했다. 방금 건 입력된 감정이다. 기실 알렌은 어디까지가 실지 자신의 소유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온갖 기술과 태엽으로 태어났다. 그건 박사의 솜씨였고 알렌 그 자체가 아니었다. 박사는 아버지였고 창조주였으며 절대자였다. 그래서 박사를 사랑했을까? 낡은 파이프관 사이에 끼어 굳어간 기름의 쩌든 내를 맡고 무수한 시곗바늘이 불협화음으로 .. 이전 1 2 3 4 다음